주수자 희곡집 ‘ZERO’, 영국 정식 출간…K문학 해외 확장 이정표
실험적 언어와 세계관 담은 네 작품, 무대와 책 넘어 국제 독자와 만난다

출판은 영국의 독립 출판사 페이지애디 프레스(Page-Addie Press)가 맡았으며, 영국 최대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스(Waterstones)를 비롯한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한국 현대 희곡이 영문 번역을 거쳐 정식으로 유통된 사례라는 점에서 이번 출간은 K문학의 장르적 확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이번 'ZERO'에는 원작 희곡집 '공공공공'에 실렸던 네 편의 작품이 모두 수록됐다.
△'ZERO'-타인과의 단절 속에서 고독과 맞서는 주인공의 내면을 통해, 존재의 '기점'을 탐구한다.
△'NIGHT PICTURE OF RAIN SOUND'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과 기억이 교차하는 무대를 제시한다.
△'CLONE1001'-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 공상과학극으로, 자아와 정체성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
△'VEGABONDS'-과거·현재·미래가 자유롭게 교차하는 SF 뮤지컬로, 시간의 상대성과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동시에 묻는다.
네 작품은 각각 다른 형식을 취하면서도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공통된 질문을 중심에 두고,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긴밀히 연결된다. 페이지애디 프레스 측은 "네 편의 희곡은 서로 다른 색채를 지녔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의 경계는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고 평했다.
영문 번역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번역가 제니퍼 M. 조(Jennifer M. Cho)가 맡았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과 창작 글쓰기를 전공한 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원작의 실험적 언어와 감각적 리듬을 살리면서도 영미권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게 풀어낸 점이 특징이다.
문학평론가들은 "이번 번역은 한국 희곡의 문법을 서구 무대 언어와 자연스럽게 접목한 드문 성취"라고 평가한다.
주수자 작가는 지난해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수상작 '소설 해례본을 찾아서'는 실존 국문학자 김태준의 연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으로, 문자와 언어의 역사적 의미를 다층적으로 재현해 높은 평가를 얻었다. 이번 영국 출간은 그가 국내 문학적 성취를 넘어 국제 무대에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희곡집 출간과 더불어 원작 무대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연극 '공공공공'은 서울예술대학교 장두이 교수를 비롯한 배우들이 출연해 상연될 예정이며, 실험적 텍스트가 어떻게 무대 언어로 구현될지 관심이 모인다. 해외 출간과 국내 공연이 동시에 전개되며, 'ZERO'는 책과 무대 양쪽에서 새로운 독자와 관객을 맞이하게 될 전망이다.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은 주로 소설과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번 'ZERO'출간은 상대적으로 해외 무대에서 주목받기 어려웠던 한국 현대 희곡이 본격적으로 번역·출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주수자 작가는 인터뷰에서 "언어와 무대는 늘 국경을 넘어선다. 희곡이 가진 보편적 힘이 이번 출간으로 더 많은 독자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ZERO'의 영국 출간은 단순한 번역 출판이 아니라, 한국 현대 희곡이 세계 문학 장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다. 주수자라는 개별 작가의 성취를 넘어, 한국 문학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낯선 세계와 자아, 경계와 시간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ZERO'는 영국 무대를 거점으로 더 많은 언어와 독자 속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을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