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한수원, '수출 통제 덫' 못 벗어나...'1997년 합의'는 왜 무용지물 됐나
수출 통제 피하려면 웨스팅하우스에 자료 넘겨야
독자 기술 완성해도 미국 중심의 검증 거칠 필요
"저작권·특허 논란 끝" 합의도 제 역할 못해
'체코 뺏긴다' 급한 한수원, 바닥 협상력으로 합의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이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원하는 기술 정보나 정보 등을 모두 제공하기로 협약한 사실이 파악됐다. 겉으로는 원전 수출 시 미국 에너지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 한국 측이 이 과정에서 웨스팅하우스의 협조를 바탕으로 최종 수주에 문제를 겪지 않게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 원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결국 웨스팅하우스에 설계나 수주 조건 등 업무상 비밀을 제공해야 할 수밖에 없어 미국의 수출 통제 규제의 덫에 영구적으로 갇혀버렸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또 이 과정에서 우리 측이 '추가 기술료 없이 원전 수출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근거인 1997년 당시 한국전력과 웨스팅하우스 측의 전신 ABB-CE가 합의한 내용조차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를 위해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했던 부분이라고는 하지만 성과 창출에 매몰돼 지나치게 많은 것을 내어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025년에도 못 벗어난 수출통제의 벽

20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한전·한수원은 1월 웨스팅하우스와의 작성한 합의문에서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형 원전에 미국의 기술이 포함됨을 확인했다"는 점을 전문에 밝히고 수출 통제에 대해선 △한전·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수출 통제 규정을 따를 수 있게 협력하며 웨스팅하우스가 요구하는 모든 기술 문서 및 정보를 제공할 것 △웨스팅하우스는 한전·한수원이 미국 정부로부터 수출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노력할 것이라고 뜻을 모았다.
이 같은 합의의 배경에는 원자력공급그룹(NSG) 지침과 미국 연방 규정이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특정 원전 기술을 수출 통제 대상으로 지정해 외국에 넘길 경우 에너지부의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하도록 했다. 체코 원전 수주 당시 한수원은 체코가 신고만 하면 되는 대상 국가라 웨스팅하우스 없이 혼자서 미국 에너지부에 신고하려 했다. 그런데 미 정부가 '신고는 미국인(혹은 미국법인)이 제출해야 한다'며 이를 반려했고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의 협력 없이는 수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한수원에 밀려 체코 원전 수주에 실패한 웨스팅하우스는 뒤늦게 1월 합의 과정에서야 태도를 바꿨다.
겉으론 체코 때처럼 차질이 없게끔 웨스팅하우스가 우리 측에 적극 협조할 것을 강제하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실상은 수출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발이 묶였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먼저 이번 합의를 통해 한국형 원전, APR 계열과 OPR 계열에 미국 기술이 포함됐다는 미국 에너지부의 판단을 두 나라 모두 인정했다. '기술 독립'을 해 수출에 문제가 없다며 홍보하던 한수원 측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또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가 달라는 자료를 모두 넘겨야 한다. 최근 한전을 중심으로 베트남 원전 수출을 추진 중에 있는데 이때도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 독자 기술을 확보해 수출하려 해도 웨스팅하우스나 미국 내 제3의 전문 기관이 확인하고 동의해줘야 한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체코 원전 수출 추진 과정에서 한수원이 미 에너지부에 신고를 하면서 입찰 서류, 설계 등 자료를 넘겨줬다"며 "미국 측이 여기에 자신들의 기술이 포함된 점을 찾아내면서 상황이 이렇게 흐른 게 아니겠냐"고 했다.
1997년 합의 역할 못해... "대비책 마련 부실" 비판

이번 협의 과정에서 1997년 웨스팅하우스의 전신인 ABB-CE와 한국 측이 맺은 합의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원자력발전백서'에 보면 한국은 3,000만 달러를 주고 10년 기한의 '기술사용협정(LA·License Agreement)'을 맺었다. 백서는 "도입 기술에 대한 영구적 실시권을 보장받게 했으며 ABB-CE의 설계 자료를 확보해 APR1400 개발의 기반을 구축했다"고 설명한다. 또 2000년대 초반 한국원자력연구원 자료에는 미국이 핵심적으로 생각하는 기술의 경우에도 "1회의 기술료 지불로 실시권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며 "저작권·특허 사용 제약이 해소됐다"고 했다.
한국의 관계 당국이나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이 협정이 유효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 때도 웨스팅하우스에 2조 원 규모의 일감을 떼주고 갈등을 해소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또 체코 수주를 놓칠까 마음이 급해진 한국 측의 협상력은 바닥일 수밖에 없었다. 양측 협상 과정을 잘 아는 정부 관계자는 "LA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원전 건설과 관련한 '기술 실시권' 부분이 완벽하지 않아 한수원으로서는 합의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기존 협약에 대해 꼼꼼히 대비책을 마련해두지 않은 탓에 로열티가 10년에 3,000만 달러에서 1기당 1억7,500만 달러로 불어났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전날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의원들 역시 "차라리 10년마다 3,000만 달러짜리 계약을 했다면 비슷한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겠냐"며 아쉬움 섞인 질책을 쏟아냈다.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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