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속노화와 흔들리는 달러 패권 [아침을 열며]
위기신호 나오는 미국 패권
눈에 띄게 줄어든 달러 선호
'연옥상태' 대응한 국가 전략

달러, 미국 패권의 마지막 보루
패권국도 생명체처럼 태어나 성장하고 결국 쇠퇴한다. 로버트 길핀, 폴 케네디, 찰스 킨들버거 같은 석학들이 지적했듯이, 제국의 흥망은 생물학적 노화의 과정과 닮아 있다. 많은 학자들은 미국 패권이 전성기를 지나 '노화 단계'에 이미 들어섰다고 본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1기와 2기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정책들은 미국이 심각한 '가속 노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먼델은 "최적 국제통화의 수는 3보다 작은 홀수"라고 말한 바 있다. 국제통화는 본질적으로 독과점적 성격을 띠며, 일단 지위를 확보하면 네트워크 효과와 경로 의존성이 작동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통화의 지위도 영원하지 않다. 20세기 영국의 전례가 보여주듯, 패권은 기술과 산업에서 밀리고, 무역에서 후퇴한 뒤, 마지막으로 통화·금융 지위가 흔들리면서 몰락한다. 현재 미국 패권의 노화속도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 역시 달러에 대한 신뢰라고 볼 수 있다.
안보와 달러패권의 교환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였다. 당시 달러의 특권적 지위는 금태환 의무(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언제든지 금 1온스를 35달러로 교환해줘야 함)와 결부되어 있었다. 금태환은 1971년 미국 닉슨에 의해 일방 종료되었고 전세계는 환율이 시시각각 변하는 체제로 이행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던 국가들은 여전히 달러를 기축통화로 간주했고 미국은 이전 체제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의무를 벗어던진 달러에 대한 비판은 냉전 시기 동안에는 잠잠했다. 소련에 맞서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다들 필요로 했고, 달러 특권을 그 대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흔히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른다. 국방비로 천조 원 이상을 쓰는 국가라는 의미이다. 대외적인 개입을 줄이겠다는 트럼프 행정부 역시 2025년 4월 사상 최초로 국방예산을 1,000억 달러 이상 증가한 1조 달러 규모로 요청했다. 이렇게 막대한 국방비를 미국이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는 달러 특권이다. 달러가 기축통화이며 전 세계가 미국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받아들이는 덕분에, 미국 정부는 증세보다는 국채 발행을 통해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2025년 6월 현재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는 일본(2024년 GDP 대비 약 29%), 영국(2024년 GDP 대비 24%), 중국(2024년 GDP 대비 4%) 순이다. 한국의 미국 국채 보유액도 GDP 대비 6.8%로 높은 규모이다. 하버드대 로드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들이 외환보유고를 미국 국채 같은 안전자산에 투자함으로써 포기하는 기회비용은 GDP의 1%에 이른다. 쉽게 말해 한국이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로 매년 20조원 규모의 사회보장이나 인프라 투자를 포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달러패권에 지불하는 비용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이 금융위기나 코로나와 같은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긴축하거나 팽창하면 전 세계는 그 파장을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미국에 염증이 생기면 전세계가 소염제를 맞고 미국이 설사를 하면 전세계가 지사제를 먹는 꼴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미국의 양적완화로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2022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개발도상국들이 자본 유출과 통화 절하에 시달렸다.
바로 이것이 교환의 핵심이었다. 세계 각국이 미국 국채를 사들이며 미국의 빚과 인플레이션(혹은 디플레이션)을 떠안아 왔기에, 미국은 대규모 증세 없이도 천조 원이 넘는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증액하며 국제질서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환은 이제 벽에 부딪혔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2024 회계연도 미국의 국채 이자 비용이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넘어섰다. 국가 부채는 약 100일마다 1조 달러씩 증가하고 있으며, GDP 대비 부채 비율은 120%를 넘어섰다.

균열의 신호?
트럼프 2기의 혼란스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아직 달러 패권이 흔들릴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말한다. 더 나은 대안이 없고, 미국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가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련 붕괴 직전 소련 전문가들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조금만 돌아보면, 역사는 패권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보여준다. 1914년 파운드화는 세계 외환거래의 60% 이상을 차지했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과 경제 위기를 거치며 불과 40년 만에 달러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달러트랩』을 쓴 에스와르 S. 프라사드는 달러에 대한 신뢰는 궁극적으로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넓고 깊은 금융시장과 연방준비은행의 독립성)와 미국의 사법 및 정치 시스템(견제와 균형 원리)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다고 설명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달러 특권은 흔들릴 수 있다.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현재 달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있다는 징후들은 속속 관측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금 보유량을 늘리고 달러를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2025년 기준 금이 전체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20%에 달해 유로를 제치고 두 번째로 큰 보유 자산이 됐다. 2025년 1분기 기준 전 세계 외환보유고 구성을 보면 달러 57.7%, 유로 20.1%, 금 20%, 기타 통화 2.2%다. 금의 비중은 2025년 2분기에 24%로 4% 포인트 증가했다.
두 번째 현상은 각국 중앙은행의 미국 채권 '만기 단축'(maturity shortening) 전략이다. 중국은 올해 초부터 보유한 미국 국채의 만기를 조금씩 낮추는 전략을 펴고 있다. 2025년 2월 기준, 중앙은행들은 장기 국채 196억 달러를 순매도한 반면, 단기 국채는 616억 달러를 순매수했다. 이는 중앙은행들이 수익률보다는 위험 회피와 유동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옥상태의 국가전략
일방적 관세와 강압적 투자유치를 통한 제조업 부흥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목표는 건강한 식단과 운동을 거부하고 남의 피부를 이식해서 회춘하고자 하는 늙은 미국의 노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문제는 미국의 이러한 일련의 시도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구질서의 지속 사이의 불안정한 연옥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연옥상태에서는 예측 가능했던 기존 룰이 흔들리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룰이 명확히 자리 잡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지정학적으로 취약하고 힘이 약한 국가들이 이 연옥상태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과거의 체코, 폴란드와 발칸반도가, 오늘의 우크라이나와 대만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자강과 유연한 적응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목표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박종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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