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4만7000원 봉투가 코뿔소 되기까지
이제 산업 전체를 위협해
명백한 위험 외면한 대가는
거대한 코뿔소와의 충돌

‘부모님들은 매달 두툼한 노란 봉투를 들고 오셨습니다. 그 봉투는 우리 가족의 행복이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은 노란 해고 봉투를 들고 오셨습니다. 그 봉투는 우리 가족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2013년 한 시민단체의 ‘노란 봉투 캠페인’ 문구는 감성적이었다. 그해 쌍용차 노조는 4년 전 불법 파업에 대한 손배소 1심에서 47억원 배상 판결(대법원에선 20억원)을 받았다. 이후 ‘10만명이 4만7000원씩 모아…’라는 한 주부의 편지가 반향을 일으켜 캠페인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노란 봉투가 훗날 한국 산업계를 위협하게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해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선 미셸 부커라는 여성 경제 전문가가 새로운 리스크 개념을 들고나왔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그 영향도 명확하지만 사람들이 외면하는 거대하고 뻔히 보이는 위험’, 이 개념을 그녀는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고 불렀다.
12년 전 노란 봉투는 이제 법의 이름으로 현실화하기 직전이다. 이를 명백하고도 거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한 재계의 거듭된 외침은 여당 의원들의 ‘공포 마케팅’이라는 한마디에 일축당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 그가 선택했던 노동부 장관(김대환)조차도 이 법에 대해 ‘노무현 정신과 어긋난다’고 심각하게 우려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마이동풍이다. 결국 한국 산업계는 거대한 ‘회색 코뿔소’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 개념을 창시한 미셸 부커조차도 놀랄만한 사례이지 싶다.
일반 국민들에겐 ‘공장 주인의 호소’보다는 노란 봉투의 감성적 메시지가 더 와닿는 법이다. 재계가 더 노력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란봉투법의 파급력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여당의 입법 폭주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당초 노란봉투법의 핵심은 파업 피해에 대한 사용자의 손배 청구를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해고 노동자에게 억대 손배소는 가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조 상대 배상 소송 판례들을 보면 사법부는 노조에 책임을 물으면서도 기업이 주장하는 피해 규모도 늘 합리적으로 조정했다. 법원은 일방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법정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었다.
노란봉투법은 입법이란 형식을 통해 결국 사법부의 합리적인 판단 가능성마저 봉쇄하는 것에 다름없다. 법이 초래할 결과는 단순한 손배소 감소가 아니다. ‘불법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메시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손배 청구 제한에서 시작된 이 법은 노조의 쟁의 대상을 회사의 경영상 판단까지로 넓히고, 원청에 대한 하청 노조의 교섭 가능성도 열어준다. ‘약자 보호’라는 명분이다. 하지만 명분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정교한 설계로 뒷받침돼야 한다. 현실에선 과격한 파업과 무더기 교섭 러시(rush)에 대응 수단을 잃은 기업들이 노조를 낀 기업에 대한 외주, 채용을 줄이고 장기적으론 해외 이전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해외 기업들도 ‘노조 리스크’가 큰 한국을 반길 리 없다.
기업 현장에선 “결국은 우리 산업계의 약한 고리인 중소기업과 협력 업체, 비정규직이 제일 큰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법이 명분과 달리 약한 자부터 일터 밖으로 내모는 법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미셸 부커는 ‘사회를 무너뜨리는 건 예상 못한 불운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던 위기를 외면한 무책임’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가 거대한 코뿔소에 부딪히기 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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