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우리가 수출한 ‘K힐링’의 정체

황지윤 기자 2025. 8. 2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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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의 한국 소설 매대. /뉴시스

얼마 전 ‘K힐링 소설’이 최근 해외에서 유난히 인기라는 기사를 썼다. 해외 출판사나 저작권 에이전시에서 K힐링 소설을 콕 집어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SF나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전 세계 소설 시장에서 한 장르가 된 것이다.

국내 밀리언셀러인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이나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윤정은 작가의 ‘메리 골드 마음 세탁소’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일상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소하고 따듯한 이야기. 독자에게 위로를 준다고 해서 ‘힐링 소설’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2020~2023년 인기가 절정에 달했고, 2022년 즈음 해외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K힐링 소설은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출판 지원을 받은 한국 문학 도서의 해외 판매량은 지난 한 해 120만부를 기록해 전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최근 5년간 해외 누적 판매량은 268만부에 이른다. 번역원도 “K힐링 소설의 폭발적 성장 덕에 해외 독자층의 폭이 넓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환호 속에서 “대체 왜?”라고 묻는 한국인이 많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 흥미롭다. K힐링을 “경쟁이 치열하고 번아웃이 만연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 낳은 장르”라고 봤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팬데믹 이후 ‘필굿(feel good)’을 원하는 독자가 늘어난 영향”이라고 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전 지구인의 삶이 K힐링을 갈망한다는 뜻이다. 풍자하자면 ‘메이드 인 헬조선’인 이 장르는 어쩌면 해외뿐 아니라 지옥에서조차 널리 읽힐지 모른다.

이코노미스트의 또 다른 분석이 폐부를 찌른다. “이 장르의 성공은 현실 도피(escapism) 유혹을 보여준다”는 것. K힐링 소설은 대부분 특정 장소가 배경이다. 상처를 씻어내는 빨래방, 꿈을 사는 상점…. 일상 속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같지만, 현실에선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장소다. 부드럽고 폭신한 세계를 좇는 K힐링의 이면엔 현실 도피적 성향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해석이다.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눈을 돌리게 하는 세러피(치료)에 가깝다.

물론 각자의 취향은 존중해야 한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겠다는 게 죄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K힐링의 기저에 깔린 문화적 코드가 ‘현실 도피’ 또는 ‘ 현실 회피’라면 우리는 세계에 무엇을 수출하고 있는 것인가. 마냥 기뻐할 일인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어떤 대단한 민족이 세계인을 빨래방에, 편의점에, 백화점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최면을 걸어 사람들을 다독이고 위로하며 그들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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