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섬, 월미도] 2. 잿더미로 변한 고향…생존자가 기억하는 75년 전 악몽

변성원 기자 2025. 8. 20. 21:3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美 전투기 폭격에 순식간에 쑥대밭
피해자 이애자씨 "갯벌로 도망쳐 살아"
작은오빠희생⋯어릴적 상실감 여전

2007년 수집 '美항공 공격 보고서'
"모든 시설 불태우는 임무로 출격"
韓 해전서도 '거주지 완전 소실' 기록

생존자 "마을 전소⋯美기지멀쩡" 의문
전문가 "월미도폭격, 사실상 절멸 작전"
▲ 1950년 8월30일 미 해병대가 인천항 일대 북한군 무기 시설을 표시한 지도. 좌측 상단 부분이 월미도. 미 해병대는 그해 9월10일 폭격과 9월15일 상륙작전에 앞서 항공 사진 등을 바탕으로 월미도와 인천항 일대 북한군 무기 배치를 파악한 상태였다. /자료=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 아카이브 연구소

"내가 아니었으면 우리 오빠가 살았을 텐데."

지난달 21일 인천 중구 동인천역 인근에서 만난 이애자(84)씨는 먼저 떠나보낸 작은 오빠를 떠올렸다. 어린 소녀에게 새겨진 상실감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전투기의 굉음, 불길에 휩싸인 마을, 오빠의 얼굴. 애자씨는 75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 같았던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폭격을 피해 도망쳐온 동인천에서 매 순간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오십이 넘도록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그날로부터 멀어진 시간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시간이었어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불쑥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은 월미도 원주민 마음속에서 끝내 과거형이 되지 못했다.

▲ 상륙 지점 가운데 하나인 그린 비치(녹색 해안)를 1950년 7월에 촬영한 사진. 월미도 해안이다. 배를 접안할 수 있는 구역은 화살표로 따로 표시됐다. /자료=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 아카이브 연구소

잿더미로 변한 원주민 마을

1950년 9월10일 오전 6시. 작전 임무 '월미도 동쪽 지역 전소'.

미 해병 소속 전투기 14대가 항공모함에서 이륙했다. 이날 오전 6시50분쯤 월미도 북쪽 상공에 진입한 항공기들은 폭격 지점을 한번 둘러본 뒤 네이팜탄을 각각 2발씩 투하했다. 

가솔린 혼합물인 네이팜탄은 3000도 고열로 반경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파괴력을 지녔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애자씨도 그날 아침 '멀리서부터 날아다닌 불덩어리'를 목격했다.

"며칠 전부터 비행기가 돌아다녀서 왜 그럴까 생각만 했지. 아침부터 갑자기 펑펑 소리가 들려서 사람들이 전부 집 밖으로 뛰쳐나왔어요. 비행기가 얼마나 낮게 날았는지 조종사가 쓰고 있던 모자도 보일 정도였다니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7년 수집한 '미 해병 항공 공격 보고서'를 보면 당시 "네이팜탄으로 철저히 집중 폭격. 모든 시설을 불태우는 것"을 임무로 출격한 전투기들은 수평 저공비행으로 500피트(약 150m) 상공에서 폭격했다. 동네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다시 오전 7시45분. "목표 지점 날씨는 맑음".

마을을 뒤덮은 연기 사이로 2차 폭격이 시작됐다. 월미도 동쪽 해변으로 이어지는 둑길 주위에 공격이 가해졌다. 지금의 월미공원, 애자씨가 살던 마을 주변이었다.

"바닷가 근처에 살아서 아무것도 못 챙기고 갯벌로 뛰어들었어요. 다행히 그때 바닷물이 빠져 있었으니까 갯벌로 도망칠 수 있었지. 물이 차 있었으면 아무도 못 살았을 거예요."

애자씨 기억은 다른 생존자들 진술과도 일치한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월미도 원주민들은 "네이팜탄이 떨어진 후 사람들이 급히 해변으로 뛰었는데 미군이 기총소사를 했다", "간조 상태 갯벌로 대피했고, 사람들은 기총소사를 피하기 위해 서로 진흙을 발라줬다"고 떠올렸다.

그리고 오전 11시15분. "목표 지역 90% 파괴".

3차 폭격까지 감행한 뒤에야 미군은 임무를 개시한 지 7시간여 만인 오후 1시5분쯤 작전을 완전히 종료했다. 당시 월미도 전체 면적은 축구장 92개 크기인 0.66㎢에 불과했는데, 이날 동쪽 지역을 공격하는 데 투하된 네이팜탄 수는 총 95개였다.

▲ 월미도에 상륙한 미 해병대원들이 주민에게서 월미도 지역 정보를 듣고 있다. 해병대원과 주민 뒤에 폭격으로 불타는 초가집들이 보인다. /자료=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인천문화재단

▲미군은 멀쩡한 기지로 돌아왔다

"갯벌로 도망치는데 무릎 절반 높이까지 발이 푹푹 빠져서 뒤처지니까 작은오빠가 도와준다면서 되돌아왔지. 그러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치면서도 나를 데리고 갯벌을 건넌 거예요. 동인천 작은아버지 댁으로 피했는데 결국 며칠을 못 버텼고."

애자씨는 너무 이른 나이에 맞닥뜨린 가족과의 이별을 떠올렸다. 숨진 작은오빠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죄책감으로 눌러앉아 있다.

월미도 폭격 사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공식적으로 단 10명에 그친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거주민 명단과 제적부 등을 검토한 결과, 월미도에는 약 120가구에 600여명이 거주했으며 실제 사망자는 100여명에 달할 것으로 판단했다.

'항공 공격 보고서'에 기재된 3차례 폭격 경과는 진실화해위원회 추정에 더욱 힘을 싣는다. 미 해군본부가 발간한 '한국에서의 해전'(1957)에서도 "다음 날 항공 사진을 분석한 결과 지역 내 44개 건물 중 39개가 파괴됐고, 거주지역은 완전히 소실"이라고 기록됐다.

다만 생존자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있다. 수많은 민간인 희생을 낳은 공격에서 과거 미군 군사시설이었던 건물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당시 생존자들은 "동네는 기둥 하나 없이 폭삭 무너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10~20m 떨어진 미군 부대 막사는 공격받지 않아 멀쩡했다", "미군이 점령한 후에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목재를 나르도록 해서 월미도에 들어가 봤는데 미군 막사는 멀쩡했고, 다시 들어온 미군이 사용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광복 이후 월미도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미군은 1946년부터 인천항과 월미도, 영종도 기지를 하나로 묶어 '캠프 인천'이라고 불렀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미군은 원래 기지로 돌아왔다.

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1950년 8월 미 공군 정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은 월미도에 북한군 500여명과 주민 500여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북한군 대부분은 참호나 동굴에 엄폐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며 "미 해병 항공단은 월미도 미군 기지를 제외한 주민 거주지와 참호에 집중 폭격과 사격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 해안에 건설된 미 해군 캠프 모습. 캠프 뒤편에 폭격으로 폐허가 된 월미도 민가 모습이 확인된다. /자료=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인천문화재단

▲"한마디로 '절멸 작전'이었다"

월미도 폭격 배경에는 '무력화'가 있었다. 미군은 이미 한 차례 상륙작전에 실패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하며 발발한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꼽히는 이오지마 전투에서다.

미일 양국은 1945년 2월19일부터 3월26일까지 일본 이오지마 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이오지마 섬에 상륙한 뒤 손쉽게 점령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동굴 진지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 기습에 속수무책 당하며 2만6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월미도 폭격 전날인 1950년 9월9일에야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했다. 미군 내부에서도 상륙 지점을 놓고 논쟁이 오갔다. 낮은 수심과 조수 간만의 차, 그리고 해발 105m 월미산 정상에서 인천항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미도의 지형적 조건은 상륙작전에 걸림돌이나 다름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인천상륙작전과 반격 작전'(2009)에서 "큰 위험을 감수하고 접근해야만 하는 좁은 수로를 통해 가까스로 인천항에 접근하면 눈앞을 가로막는 월미도가 나타난다"며 "해상으로부터의 항만 접근로를 가로막고 감제(瞰制·내려다보며 제어함)하는 월미도는 당시 동굴 속 무수한 북한군 포진지와 참호들로 요새화돼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투기 폭격은 민간인 집단 거주지를 가리지 않았고, 기총소사까지 가해졌다. 마을 존재는 미군이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월미도 원주민 마을은 '캠프 인천'으로 불렸던 미군 기지와 인접해 있었다. 미군은 상륙작전을 앞두고 정찰대가 촬영한 항공 사진을 바탕으로 월미도 건물과 무기 시설 위치도 확인했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규명했던 김구현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1%의 불확실성마저 덮어버리는 융단 폭격이었다"며 "당시 북한 지역에선 초토화 작전이 이뤄졌지만, 38선 이남에선 월미도와 같은 집중 폭격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지역이 위협을 가하는 수준이었다면 월미도에선 한마디로 '절멸 작전'을 수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Copyright © 인천일보 All rights reserved - 무단 전재, 복사,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