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골 마을잔치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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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을 먹이려면 섬세함보다는 뚝심이 필요하다.
'마을잔치'를 준비 중이다.
전국에서 모인 청년 교인들과 함께 재개발을 앞둔 정릉골에서 마을잔치를 열었다.
마을잔치에 누구나 오시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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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여럿을 먹이려면 섬세함보다는 뚝심이 필요하다. 쩨쩨하게 간을 봐야 하는 음식은 삼간다. 다소 무식해 보일 정도로 재료를 넣고, 이게 맞나 싶을 만큼 조미료를 넣으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모든 재료를 넉넉히 받아낼 만큼 큰 솥과 펄펄 끓는 화력. 대파 따위를 무심히 툭툭 썰어 낼 가능한 넓은 도마와 투박한 칼만 있으면 된다. ‘마을잔치’를 준비 중이다. 한쪽에서는 전을 부치고, 마당에서는 커다란 들통 두개에 돼지고기 넣고 펄펄 끓인다. 기술은 필요 없다. 고기는 잡내만 잡으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물과 시간의 몫이니 지켜보다가 됐다 싶으면 큼지막하게 잘라 보기만 하면 된다. 아직이다 싶으면 다시 넣고 끓이기를 반복하면 수육은 됐다. 전 부치는 일엔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십장 부쳐 내는데 두어장 태우는 거로 눈치 주는 법은 없다. 잘못 구워 낸 것은 그 자리에서 먹어 버리면 그만. 잘 부쳐 낸 것들만 차곡차곡 쌓는다.

전국에서 모인 청년 교인들과 함께 재개발을 앞둔 정릉골에서 마을잔치를 열었다. 학생들이 살벌한 글씨체로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는 펼침막을 쓰는 동안 활동가와 주민들은 위원장 댁 주방에서 백명은 먹어도 될 만큼의 안주를 준비한다. 상자째 사 온 막걸리는 냉장고 두대를 가득 채웠고 전 부쳐 내는 냄새와 수육 삶는 냄새로 마당 담벼락 넘어 동네에 잔치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린다.
십몇년 전, 서울에서 버스 한대에 사람 가득 채워 밀양 평밭 마을을 향했다. 수도권에 전기 대려면 마을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가 찬 사람들이 그 먼 밀양을 제집 드나들듯 오가던 시절이다. 통 크게 마을회관을 빌려 밀양시장에서 떼 온 상자 가득 담긴 수육과 어르신들 따라 드렸던 막걸리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 싸움에 지쳐 날 서 있었던 주민들도 그날만큼은 얼싸안고 장구 가락에 춤을 췄다. 나는 ‘잔치’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이 있을 리 없는 세대이지만, 본능적으로 그게 잔치인 줄 알았다. 단순하고 호불호 없는 음식을 잔뜩 차려 푸지게 먹고 헤어질 기약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 묵은 얘기든 날 선 얘기든 흥청망청 신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 배운 적 없어도 그게 잔치인 줄 알았다.
그 기억에 기대 재개발을 앞둔 정릉골에서도 수육을 삶았다. 비건 연대인을 포함해 모두가 먹을 수 있어야 하니 부추전이며 이것저것 함께 준비한다. 그 옛날 청계천 정비 사업으로 쫓겨나 산골에 자리 잡은 가난한 도시민들의 굴곡진 삶이 어려 있는 동네다. 짧게는 십년 남짓, 길게는 수십년 이웃해 살던 이들이 재개발 앞에 찢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동네에 살았던 가옥주들은 세입자 대책이 포함된 재개발을 고심했으나, 재개발 지역이 으레 그렇듯 투기꾼들은 그런 소리에 가만 넘어가질 못한다. 개발 청사진을 두고 결론을 못 내리는 동안 세입자에 대한 압박 수위는 올라가고 있고, 소리 소문 없이 떠나는 주민들로 인해 남은 이들은 불안하다.
마을잔치에 누구나 오시라 했다. 대책위 가입 않던 주민들은 물론, 원한다면 조합원들도 오시라 했다. 술기운에 목소리 높인 이들도 있었다. 멱살까지야 안 잡았지만, 위태로웠던 순간들도 있었다. 배운 적 없어도, 이게 잔치인 줄 알았다. 절박함과 흥겨움이 장단을 맞췄다. 이 마을에도 이런 날 종종 오던 시절이 있더랬다. 결국 자리에 앉았던 이들, 한목소리로 외쳤다. ‘정릉골 세입자의 주거권을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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