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폭도가 아니라 대한제국 의병이다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9)]

박경호 2025. 8. 20.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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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살인·폭력죄 처벌… 폄훼된 항쟁, 더럽혀진 명예
1907년 전쟁 1945년 광복 2025년 오늘… ‘당신들은 지지 않았습니다’

1907년 전국 1만명 연합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 시도
일제, 폭도·강도 규정… 실제론 군함 등 동원 전시 상황
강화 의병 김용기·지홍윤 부대, 수 척 선단 구성해 전투
1908년 판사 일본인 74명·한국인 36명… 사법부 장악돼
김용기, 강도·살인죄로 교수형 선고… 포로 대우 못받아
이토 히로부미 “결코 내란 아냐”… 교전단체 해석 차단
지홍윤도 체포뒤 순국 추정… 의병 자료 추가 발굴 필요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 기자로 1907년 한국에서 의병을 직접 만나 취재한 프레더릭 메킨지(Frederick Arthur MacKenzie·1869~1931)가 촬영한 의병 부대 사진. 양평군 오빈리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위키피디아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해 사실상 식민 통치에 돌입한다. 을사오적(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을 비롯한 친일 관료들과 무능한 정부는 일본의 국가 침탈을 무력하게 바라보거나 오히려 돕고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최후까지 조국을 지키고자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선 열사들도 있었으니, 우리는 그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1905년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에서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에 이은 8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군인 출신들도 의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군인 출신 의병장이 지휘하는 의병 부대는 조직적인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과 맞섰다.

1907년 말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등 전국의 의병 부대들은 약 1만명 규모로 연합한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진공작전’까지 시도했다. 서울진공작전 당시 잠시나마 전쟁에 준하는 진용을 갖췄던 의병 연합 부대는 국제법상 ‘군대’로 인정해 달라고 국제사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의병을 ‘폭도’ 내지 ‘강도’로 규정했다. 의병 항쟁을 ‘전시 상황’이 아닌 ‘폭동’으로 축소했다. 실제로는 대형 군함과 어뢰정까지 동원하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음에도 대외적으로는 의병 항쟁의 의미를 격하했다. 체포된 의병들의 재판 기록과 일본군·경찰이 작성한 각종 보고서를 보면, 한일 강제병합 직전 사법부는 의병들을 강도죄 또는 폭동죄로 처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사법권을 이용해 의병 항쟁을 강도나 폭동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폄하할 수 없는 의병의 활약상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들이 일본 측 문서로 남아있다. 수많은 의병 부대가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힌 인천 강화도 의병 이야기로 그 활약상을 재조명한다.

■ 섬과 섬 사이, 신출귀몰 강화 의병

1908년 8월20일, 강화도 서쪽 해역 강화만(현 강화군·연백·개풍 앞바다) 일대에서 일본 어선 보호 활동을 하던 일본 기선 스미에마루(住江丸)는 기관 고장으로 인근 섬에 입항해 수리 중이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다갈색과 붉은색이 섞인 서양식 제복을 입고 독일 마우저(Mauser)사의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의병 부대원 9명은 범선을 타고 서서히 스미에마루 쪽으로 접근했다. 의병 부대는 번개처럼 일본 기선을 습격해 일본인 선장과 승조원 3명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들을 인근 섬에 있는 의병 부대장 앞으로 데려갔다. 대한제국 육군 기병 장교 출신 의병장 김용기(1875~1909·김봉기라고도 불림)였다. 김용기 의병 부대는 스미에마루에서 엽총 2정과 탄약 60발, 현금 등을 빼앗은 후 유유히 사라졌다.

강화도를 거점으로 삼은 김용기 의병 부대는 강화만 일대 섬과 섬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활약했다. 강화·교동 일대 부유층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았으며, 강화군에 거주하는 일본인 밀정과 친일파를 척결했다. 1908년 10월 김용기 의병 부대는 강화군 내가면의 한 야산에서 고려 시대 고분을 도굴하고 있던 일본인 6명을 현장에서 처단하기도 했다. 일본 헌병대와 경찰 보고서 등을 종합하면, 김용기 의병 부대 규모는 80~90명 정도로 추정된다. (1)

일본은 김용기 부대를 비롯한 강화지역 의병 세력이 강화·황해도 연안과 내륙까지 확대되자, 1천238t급 대형 군함 치하야(千早)함과 쾌속 어뢰정 3척을 강화만으로 급파해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이 어뢰정대까지 구성해 의병 항쟁에 대응한 사례는 유일무이하다.(2) 김용기 의병 부대는 수 척의 선단을 구성해 강화도와 볼음도, 말도, 주문도 등 인근 섬을 오가며 신출귀몰한 전술을 펼쳤다. 당시 강화 연안에서 김용기 선단을 놓친 일본 어뢰정대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폭도(의병 부대)는 7척의 어선을 타고 말도 전방으로부터 주문도 동쪽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솔개호(어뢰정)가 즉시 말도 쪽으로 이동했는데, 폭도들은 어뢰정을 확인하자마자 재빠르게 사방으로 도주했습니다. 우리는 급히 추격했으나, 얕은 바다라 항해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겨우 2천m 거리에서 폭도선 2척을 포격했으나, 명중하지 않았습니다. 폭도 약 40명은 백천군(현 북한 연백군) 곶에 상륙해 도주했습니다. 우리는 육전대와 함께 상륙해 추격했지만, 폭도들은 백천군 각산리 방면으로 도주해 추격을 중단했습니다.”

대한제국군 강화분견대 장교 출신 지홍윤(1865~1909·지홍일이라고도 불림) 의병장은 김용기와 함께, 때론 독자적으로 강화·교동 일대와 해서 지방에서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돌격진 대장’이라 불린 지홍윤은 40~50명 규모 부대를 편성해 순사주재소(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맹위를 떨쳤다. 일본 경찰은 의병 부대 총대장은 김용기, 돌격대 중대장은 지홍윤이라고 파악하며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김봉기(김용기)와 지홍일(지홍윤)은 폭도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지홍일은 수비대나 헌병대와 마주쳤을 때 절대로 싸움을 피한 적이 없습니다. 본도(강화도)의 진위대 하사 출신으로, 군대 훈련 경험이 있고 때때로 군사 훈련을 부하들과 함께 직접 실시했습니다. 평소에도 어느 정도 훈련을 꾸준히 해왔으며,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교묘해 늘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김봉기와 지홍일 두 사람이 활동을 계속하는 한, 폭도의 완전한 소탕을 결코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3)

강화 의병 부대가 정식 군대 못지않은 조직력과 전략을 갖췄다고 일본 측이 인정하는 대목이다. 일본 경찰은 김용기·지홍윤 부대가 1908년 9월께 500명 규모의 병력으로 강화읍내를 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파악했다. 이 작전은 실제 이뤄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의병을 강도로 몰아세운 사법부

1909년 이른바 ‘남한대토벌’로 체포된 호남 지역 의병 사진. 일본군은 이듬해 ‘남한 폭도대토벌 기념 사진첩’을 간행해 이 사진을 수록했다. 출처/남한 폭도대토벌 기념 사진첩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권을 무력화한 일본은 사법권까지 본격적으로 장악한다. 사법 제도는 지방재판소(현 지방법원 격), 공소원(현 고등법원 격), 대심원(현 대법원 격) 등 일본의 3심제를 도입했다. 한일 양국의 판사·검사를 임용한다고 했지만, 주요 사건은 사실상 일본인 판검사들이 독점했다. 1908년 3~4월 한국 사법부의 일본인 판사는 74명, 일본인 검사는 32명이었다. 한국인 판사는 36명, 한국인 검사는 9명으로 일본인 판검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4)

김용기 의병장은 1908년 11월 초께 서양인으로부터 총기를 구매하기 위해 1천400원가량을 들고 서울을 찾았다가 그를 추적한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일본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1천400원은 마우저 소총 20여 정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지홍윤은 이듬해 1월 개성 인근의 한 주막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돼 체포됐다. 밀정의 밀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홍윤은 김용기가 체포 전 숨긴 무기 구매 자금의 행방을 쫓으려 서울로 향하던 길이었다.(5)

김용기는 1909년 3월2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이 선고됐다. 곧바로 공소(항소)했으나, 같은 해 4월30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 기각됐다. 5월2일 대심원에서도 상고 기각됐다. 교수형이 확정된 김용기는 그해 7월3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전신)에서 순국했다.(6)

의병들은 주로 대한제국 형법대전상 강도죄, 살인죄, 폭동죄, 내란죄 등으로 처벌받았다. 내란죄는 정치적 성격이 있고, 나머지 죄목은 일반 범죄에 해당한다. 한일 강제병합 직전, 김용기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들이 가장 많이 처벌받은 형법 조항은 강도죄다. 의병 항쟁이 강도나 폭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은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러나 일본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항쟁을 강도나 폭동으로 평가절하하려 했다.

전국 의병 부대가 연합한 13도 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으로 통감부를 점령해 일본과 외교적 담판을 벌이고자 했다. 13도 창의군은 한국에 있는 각국 공사에 “국제공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의병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받으면, 이들이 붙잡힐 경우 국제법상 포로 대우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법부가 체포된 의병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한다면, 한국은 내전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다. 의병들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될 가능성도 생긴다.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화를 위해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이며, 의병 토벌은 강도나 폭동을 진압하는 치안 유지 활동이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강조해야 했다. 한국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7)

“도적의 횡행은 전쟁과 완전 다르므로 전시 법규를 적용할 수 없다. 지금의 상황은 전쟁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란이라고도 칭할 수 없다. 한국의 폭도는 결코 내란이 아니다.”

초대 통감을 맡은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1908년 6월 의병 토벌 작전에 투입된 일본군 장교들에게 이렇게 연설한 이유다.(8)

파주 등 경기도 서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한창렬(1882~1909)은 1908년 9월 경성공소원으로부터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한창렬은 “(의병 활동은) 곧 내란이며 결코 강도가 아니다”라며 상고했다. 자신이 “의(義)를 명분으로 한 의병”임을 인정하라는 주장으로 읽힌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창렬의 상고를 기각하고 강도죄를 확정했다.(9)

일본은 사법부를 동원해 의병 항쟁의 의미를 축소했지만, 후대 독립운동가들은 의병의 분투를 잊지 않았다. 김용기에 이어 체포된 지홍윤 의병장은 옥중에서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홍윤의 판결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빈칸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 ‘한국광복군’ 제5지대의 전신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40년 7월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창간한 기관지 ‘한국청년’에서 의병 항쟁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홍윤을 꼽으며 약전을 썼다.

“강화도 진위대 부교 지홍윤은 군대 해산령을 받자 비분강개해 부하들을 이끌고 구국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적군 1개 중대를 격살한 지홍윤은 적의 대규모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잔여부대를 이끌고 해서로 퇴각한 뒤 역량을 확충했다.”(10)

의병 항쟁은 8·15 해방까지 그 맥을 이어간 독립군의 뿌리였던 것이다. 의병들의 재판 기록을 비롯해 그들의 삶을 온전히 조명할 자료들이 여전히 발굴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출처]

1) 일본 경무국 작성 ‘폭도에 관한 편책’(1908년 9~12월) 종합·재구성,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국사편찬위원회, 1970 2) ‘우리 지역 독립유공자(의병) 발굴·조사 연구 보고서,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 2022 3) 위 ‘폭도에 관한 편책’ 종합·재구성 4) ‘1906~1910년간 일제의 의병 판결 실태와 그 성격’, 김항기,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 2018, 9~10쪽 5) 위 ‘폭도에 관한 편책’ 종합·재구성 6)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7) 위 김항기 논문, 29~35쪽 8) 위 김항기 논문에서 재인용, 31쪽 9) 한창렬 등 판결문 종합, 국가기록원, 1908 10) ‘한국청년’ 제3기(1941년 6월10일),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국가보훈부, 1993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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