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청년 제제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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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사업자등록증을 내야 할 일이 생겼다. 별 고민 없이 로드스꼴라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 제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새로 시작하는 작은 규모 사업장들이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재무회계 일의 근간을 잡아주는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공유했다. 제제는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한다.
몇명의 또래 청년들과 일주일에 한번 만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란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을 보았다길래 어떤 감상평이 오갔냐 물으니 토론을 미루었단다. 여러가지, 그러니까 친구를 살해한 주인공 소년의 이야기를 맥락은 이해하지만 가해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옳은가 같은 고민이 생겨, 드라마와 관련한 강의나 글을 더 찾아보고 토의하기로 했다고. 제제와 친구들은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소년의 시간’과 남성성 문제, 각주와 이어쓰기’라는 강의를 듣고 다시 모이기로 했단다. 귀한 청년들일세.
두 번째 근황은 따밥 행신점에서 일주일에 한번 하는 자원활동. ‘따뜻한 밥상’의 줄임말인 따밥은 삼천원으로 누구나 배불리 먹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지역공동체를 꿈꾸는 모임이란다. 김치찌개가 주메뉴고, 청년 노인 청소년 누구나 와서 삼천원에 한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인데 제제는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는, 우리가 한 시절 엠디(MD)라고 불렀던, 뭐든지 다 하는 일을 한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번 꼭 김치찌개를 먹는데 엄청 맛있다니 한번 가볼 일이다.
제제는 믿고 먹을 수 있는 실력 있는 요리사다. 로드스꼴라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청소년평화캠프를 진행하면서 삼일 내내 제제와 함께 삼십인분 점심을 직접 준비했다. 카레 요리, 닭볶음탕, 김치전, 배추전, 미역국, 된장찌개, 샐러드, 국수, 가지가지 요리를 두시간에 걸쳐 볶고 지지고 끓였다. 캠프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어찌 맛있게 먹던지 뿌듯했지만 몸은 파김치가 됐다. 오후에 내가 쉬는 동안 제제는 퍼커션(타악기) 수업도 진행하고 아프리칸 댄스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강철 체력. 인생을 사는 데 그것 말고 무엇이 필요한가, 이제 나는 생각한다.
어쩌다 회계 업무를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제제는 가계부 챌린지 이야기를 꺼냈다. 일의 시작은 사소한 데서 비롯됐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우연히 가계부 쓰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친구는 가계부를 석달 이상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엔 단순하게 지출을 좀 알아보자 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같이 소비 현황을 들여다보면서 지출 항목을 체크했다. 자연스럽게 이런 지출은 줄이고 이 항목은 이렇게, 같은 이야길 했는데 너무 도움이 된다며 자신이 하는 사업장의 수입·지출 관리를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수입·지출을 시스템화하고 그러다 보니 사업에 관한 고민도 나누게 되고 비전과 전망에 대한 논의도 함께 하게 됐다. 그 친구가 주변 친구들한테 그 이야길 하니 의외로 가계부를 써보고 싶어 하는 청년이 많았다. 가계부 쓰는 거 너무 해보고 싶은데 매번 실패한다, 그럼 같이 해보면 좋지 않을까, 라는 의견들이 나왔고 가계부 챌린지가 시작됐다.
가계부 챌린지를 하면서 제제가 알게 된 건 청년들의 삶의 방식이다. 돈이 없을 때 청년들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식비라는 것도 가계부 챌린지를 하면서 알게 됐다. 수입이 줄면 제대로 된 밥을 안 먹고 삼각김밥 컵라면 따위로 끼니를 때운다. 가장 쉽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제는 예산을 짤 때 절대 하지 말 것이 식비를 줄이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걸 줄이는 순간 삶이 망가진다고. 로드스꼴라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살면서 제제는 삶의 양식을 재편했다. 일단 구독을 안 한다. 넷플릭스도 구독하지 않는다. 고정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온라인으로 쇼핑하지 않고 집 근처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고정비용을 줄이지 않으면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밖에서 밥 사 먹는 비율도 많이 줄였다. 되도록 집에서 직접 해 먹는다.
가계부 챌린지의 첫 번째 목표는 석달치 여윳돈을 만들어두는 거다. 가계부 챌린지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는 오랜 시간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생계에 대한 불안감을 하루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돈이 들어오는 달이 있고 안 들어오는 달이 있고 들쭉날쭉한 재정 상황은 스트레스를 만들고 우울을 유발한다. 석달 정도 돈이 안 들어오는 상황이 생겨도 일단 먹고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상황을 만들어두는 것, 만성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가계부 챌린지의 가장 큰 목표였다니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과 가계부 쓰는 루틴을 만들고 소비 습관을 훈련하는 일을 하다보니 조금 다른 야망이 생겼다. 개인이 아니라 팀, 혹은 조직 단체와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어졌다. 지인들에게 먼저 제안서를 보냈고 함께 일을 하게 됐다. 신생 조직과 협업하는 것은 제제가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다. 요번 참에 내 일을 맡게 되기까지 제제가 걸어온 길이다.
로드스꼴라에서 일하면서 재무와 회계 일을 배우게 되었는데 재미있었어요. 그동안 해왔던 대부분의 일은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재무회계 일은 똑떨어지는 정답이 있는 게 좋았어요. 그런 일이 의외로 몸과 마음을 가뿐하고 명료하게 만들어주더라고요. 일의 과정은 지난한데 내역들 하나하나 확인하고 이게 맞나 저게 맞나 과정을 거쳐 딱 완성된 표로 보면, 아 너무 예쁘다 생각이 드는 거예요. 되게 예뻐요. 수입과 지출의 합계가 딱 맞아서 모든 것이 하나의 틀로 딱 됐을 때, 아 그래 예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자꾸 이쁘단다. 누군가에게는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고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이 결산보고서 쓰는 일인데 제제는 표도 이쁘고 데이터도 이쁘고 숫자도 이쁘단다. 이쁘다, 라는 말을 할 줄 아는 이 청년이 새삼 이쁘다. 남자들에게 이쁘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다. 이쁜 걸 보고 이쁘다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슬픈 걸 보면 슬프다 말할 수 있을 거고 가슴 아픈 걸 보면 가슴 아프다 말할 수 있을 거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다. 세상의 모든 관계, 우정 연애 이별 연대 사랑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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