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기획 광주·전남 독립운동현장 50] (32)서태석, 일제 고문에 정신이상… 끝내 논바닥 벼포기 부여잡고 숨지다 [암태도 소작쟁의]
3·1운동 1주년 시위…소작인회 창립 .
1920년대 5번 검거. 3번 기소 7년간 감옥에 갇혀
사회주의 관련 사건 체포… 극악한 고문 정신이상 증세
10년 동안 온 몸 피폐 친인척 집 떠돌다 끝내 숨져
서씨 집안 연좌제 고초...2003년에야 국가 서훈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 주역 박기옥이 며느리

서태석-. 전남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 991번지에서 1885년 6월 17일 태어났다. 집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자작농이었다. 10대 시절에는 서당 교육을 받았고, 한의학도 독학으로 통독, 동네에서 명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주민들의 지지와 강직함으로 1913년(28세)에 제3대 암태면장에 취임, 1919년 11월까지 역임했다. 앞서 1911년(26세) 무렵 김활목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태석은 3·1운동 이후 면장직을 사임하고 그 해 12월 25일부터 1920년 2월 25일까지 2개월 동안 봉천, 다롄, 뤼순 등 만주 여행을 떠났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신안 출신 장병준을 만났다. 새로운 항일운동의 세례를 받았다. 서서히 자작농, 기득권층인 면장에서 민족의식이 충만한 청년으로 성장해갔다.

감옥은 서태석을 이념형 독립운동가로 변모시켰다. '서태석 평전'의 저자 박남일은 "섬마을 유지 출신으로 신식교육도 접하지 못한 30대 중반의 서태석에게 서대문 감옥은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사상적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됐다" 면서 "특히 사회주의자 김사국과의 만남은 의미가 깊었다"고 말했다. 출옥 후 김사국의 서울청년회와 결합했다. 이 단체는 1920년대 초반 국내 민족해방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청년연합단체였다.
1922~1923년에 소련 땅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오기도 했다. 암태도 주민들은 서태석이 러시아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하는데, 연해주 방문이 와전된 것이다.
1922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1923년에는 의열단 김상옥의 폭탄 투척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1924년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1923년 10월 서태석은 돌연 고향 암태도로 온다. 화려한 투쟁경력에 중앙 인맥을 구축하던 38세 활동가가 낙향한다는 게 쉬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국내 사회주의 세력은 전국적인 노동자 농민단체 결성을 추진했다.
1923년 9월 신사상연구회는 조선노농총동맹을 발기했고, 서울청년회도 조직통합과 함께 전국 규모의 노농단체 설립을 준비했다. 서태석은 농민조직 구축과 전국단위 농민단체 규합이라는 조직적 임무를 띠고 암태도에 온 것으로 해석된다.
귀향 후 소작인 중심의 농민 조직 구축에 착수했다. 암태도는 작은 한반도였다.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봉건적 농업체계와 지주와 친일경찰이라는 기득권세력, 이들과 대치하는 민중적 식민지 농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2월 3일 마침내 '암태소작인회'를 창립했다. '논 4할 소작료'라는 명확한 강령과 집행위원, 부서 등 세부조직까지 만들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암태도 주민 양은호는 "서태석은 평소 공명정대한데다 궂은 일은 솔선해서 앞서니 농민들이 자연히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면서 "키도 6척(1m80㎝)이 훨씬 넘게 훤칠한데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서 어지간한 사람은 감히 범접하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양은호 '증언집' 신안문화14호 참조 )
서태석은 소작인회 정기총회를 조직해 나가면서 소작인의 단결을 고양해 나갔다. 동시에 암태도 최대 지주 문재철에 7~8할의 고율 소작료 인하를 압박했다.
1924년 3월 문재철의 부친 문태현의 송덕비 철거를 둘러싼 돌발적인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서태석은 되레 소요 상해죄로 체포,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소작인회 간부도 추가 체포돼 모두 13명이 갇혔다. 서태석은 예심(1924. 9. 14)에서 징역 3년형, 1925년 3월 13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상해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징역 1년 11월 12일로 감형되었다.
두 번째 출옥 후 서태석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 사회주의자 길을 걸어갔다. 1927년 5월 신간회 지원 등을 내건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가 결성될 때 서태석은 무안 암태위원으로 참가했다. 9월 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서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31년(46세) 평양형무소에서 만기출소했다. 3년 8개월의 악독한 세월이었다. 그는 예전의 서태석이 아니었다.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일제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사회주의자에 대한 일제의 고문은 극악했다. 사회주의자였던 박헌영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는 일제의 고문이 어느 정도였는지 증언한다.
"일제 경찰은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1935년 서태석은 정신분열 증세가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부인과 협의 이혼했다. 그가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도망 다녔다. 누이가 살고 있는 압해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0년대 10년 동안 5차례 검거되고, 3번의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만 7년을 보냈다.
1934년부터 1943년까지 10여 년 동안은 정신이상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친인척을 못 알아 볼 정도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다.

1943년 58세, 6월12일-. 서태석은 압해면 정감리 논바닥으로 뛰어들었다. 벼 포기가 한창 자라 무릎까지 올랐다. 논바닥에 쓰러졌다. 두 손으로 벼를 확 움켜쥐었다. 하늘을 쳐다 보았다. 숨이 멈췄다.
[그후]
이태석을 비롯한 이천 서씨 집안은 소작쟁의 주역에 해방공간에서는 빨갱이로 몰리면서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집안은 연좌제에 걸려 1980년까지 공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서태석의 묘는 1976년 압해도에서 고향인 암태도 기동리 오산마을 야산으로 이장했다. 1981년 '의사 서태석추모비'가 건립됐고,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됐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전남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산29번지 (서태석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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