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처럼 이야기가 흐르는 ‘금성’
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2025년 새해를 맞아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열녀 김천덕

각설하고, 김천덕의 열녀비는 기존의 열녀비와 다른 점이 있다.
김천덕은 곽지 출신의 사비寺婢로 곽연근에게 시집을 갔다. 배를 잘 다룬 곽연근은 관아에서 중국에 바칠 신상품을 실어갈 배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아쉽게도 화탈도火脫島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천덕은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지샜다. 죽은 남편이 어찌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하염없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그녀의 아비가 자신도 모르게 명월진의 장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 가던 선비가 김천덕을 발견하고 물을 청했다가 그녀의 미모에 반해 추파를 던지자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목을 매어 자진하고 말았다.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떠나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저 이야기로 떠도는 것을 임제林悌(1549~1587)가 듣고 자신의 문집 『남명소승南溟小乘』에 남겼다. 그는 1577년 과거에 급제한 후 같은 해 11월 제주목사로 있던 부친 임진林晉을 뵈러 제주에 와서 약 4개월 동안 제주를 일주한 적이 있다. 곽지를 지나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듯한데, 「김천덕전」을 지어 그녀의 정절을 기리는 한편 못난 사내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천덕은 남쪽 거친 땅에 사는 하녀로 밭에서 김을 매며 길쌈을 업으로 삼았으니 양가 부녀자의 예의범절(규문지범閨門之範)이나 부녀자가 따라야 할 덕목의 규칙(여훈지규女訓之規)를 어찌 배웠겠는가. 허나 남편을 섬기고 정조를 지킴이 남달라 천부적인 자질이 순정하였으니 맹자의 성선설이 참으로 옳지 않겠는가? 오호라! 세상의 사내라는 것들은 작은 이해로 형제간에 다투고 친구를 배신하며, 나라를 팔아먹고 어버이를 저버리는 자도 있으며, 천덕과 같은 이가 적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임제 역시 유학도로서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는 입장은 다를 바 없으나, 그의 죽음이 결국 사내들 때문임을 은연중에 밝힘과 동시에 가해자인 남자의 허위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녀의 죽음은 정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찌질한 남자들에 대한 질타가 아니었을까? 그런 까닭에 그녀의 열녀비는 남다르다.
어찌 사내들이라고 모두 그러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애월읍 곽지리에 김정희에게 서예를 배운 박계첨(1824~1850)이 살았다. 그는 종종 대정으로 가서 추사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오성찬 소설가가 쓴 『세한도』(1986년)에 보면 대정 사람 이시형, 제주목에 사는 김구오 등과 함께 추사에게 난을 치는 법을 배우는 대목이 나온다. 추사는 이들 외에도 김구오, 이한우, 강도순, 강기석, 김좌겸, 홍석우, 김병욱, 김여추 등 여러 제자를 두었는데, 한시는 이한우, 서예는 박계첨, 김구오, 강도순이 뛰어났다고 했다. 추사의 가르침은 이런 제자들에게 전수되고 이후 제주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곽지의 박계첨이다.
곽금팔경


영주십경
한시漢詩에서 최초로 탐라를 영주瀛洲로 지칭한 것은 앞서 언급한 김만희의 7언 율시 「세모歲暮」이다. 제주의 자연 경관에 시인의 감정을 실어 처음으로 10경시를 쓴 이는 1694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익태李益泰(1633~1704)이다. 그는 목사로 재직 당시 『지영록知瀛錄』이란 문집을 편찬했는데, 영주를 알고자 하는 기록이라는 책 제목에 부합하는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를 제작했다. 두 차례에 걸쳐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대동한 화가에게 명승지를 그리도록 하여 병풍을 만들었다. 이는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제작한 기록화첩인 『탐라순력도』보다 앞선 병풍화첩이다. 아쉽게도 일부 원본이 일본에 남아 있을 뿐 제주에는 모사품만 남아 있다.
이형상 목사는 『탐라순력도』 외에도 7언 율시 「팔경八景」을 통해 제주 동북쪽의 자연경관을 읊었다. 그가 제시한 팔경은 한라채운漢拏彩雲, 화북제경禾北霽景, 김녕촌수金寧村樹, 평대저연坪岱渚煙, 어등만범魚燈晩帆, 우도서애牛島曙靄, 조천춘랑朝天春浪, 세화상월細花霜月이다. 한라채운과 어등만범 이외에 6개는 그가 우도로 가는 길에 거쳤던 지역들이다. 이형상은 이외에도 인천 앞에 있는 영종도의 팔경을 읊은 영종팔경도 남겼는데, 당시 조선사회 지식인 사회에서 이른바 팔경문화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팔경문화의 남상은 멀리 중국 남조시대 심약沈約(441~513년)으로 보는 이들이 있으나 조선조에 영향을 끼친 팔경문화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북송시대 서예가이자 문인인 미불米芾(1051~1107년)이 오대五代의 화가 이성李成의 「소상팔경도」를 얻어 「소상팔경시」를 지으면서 소상팔경을 위주로 한 팔경문화의 전형을 만들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주의 영주십경이나 애월십경, 제주팔경, 곽금팔경 등은 이러한 팔경문화의 전통과 잇닿아 있는 셈이다.
제주의 팔경문화는 이형상 이후로 순조 철종 연간에 영평리에 살았던 오태직吳泰稷(1807~1851)의 나산관해拏山觀海, 영구만춘瀛邱晩春, 사봉낙조紗峯落照, 용연야범龍淵夜帆, 산포어범山浦漁帆, 성산출일城山出日, 정방사폭正房瀉瀑의 팔경으로 이어졌고, 이에 영향을 받은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의 십경, 즉 영구상화瀛邱賞花, 정방관폭正房觀瀑, 귤림상과橘林霜顆, 녹담설경鹿潭雪景, 성산출일城山出日, 사봉낙조紗峯落照, 대수목마大藪牧馬, 산포조어山浦釣魚, 산방굴사山房窟寺, 영실기암靈室奇巖의 십경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이는 제주 조천 출신의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1818~1881)이다. 그는 성산일출城山日出, 사봉낙조紗峯落照, 영구춘화瀛邱春花, 정방하폭正房夏瀑, 귤림추색橘林秋色, 녹담만설鹿潭晩雪, 영실기암靈室奇巖, 산방굴사山房窟寺, 산포조어山浦釣魚, 고수목마古藪牧馬 등을 영주십경으로 품제하고 7언 율시를 지어 제주의 팔경문화를 완성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주십경의 본색이다. 이후 서진노성西鎭老星, 용연야범龍淵夜帆을 추가하여 영주십이경瀛洲十二景을 만들기도 했다. 영주십경에 관한 시가와 논의는 오문복 선생의 『영주십경시집』(제주문화, 2004), 이진영의 박사논문 『송대 팔경문화 연구』(제대, 2025)를 참조할 수 있다.
영주십경이든 소상팔경이든간에 이른바 팔경 또는 십경에는 그림과 시가 어우러지는 것이 제격이다. 시만 있거나 그림만 있으면 뭔가 아쉽다. 곽금팔경은 그림 대신 사진이 들어가 있는데, 굳이 한시가 아니더라도 몇 자 경관과 관련된 글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情과 경景이 어울려 감동이 배가되지 않겠는가?
비단같이 아름다운 마을


좌씨佐氏에서 좌씨左氏로
좌시우의 원래 성씨는 좌佐인데, 문과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본래 성씨인 '佐'를 '左'로 고쳐야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며 제주도내 친족들에게 청하여 성씨를 '좌左'씨로 고쳤다고 한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과연 그러했는지 약간 의문이 든다. 우선 左氏와 佐氏는 그저 사람 人이 덧붙여지거나 빠진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성씨이다. 우선 좌씨左氏는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신하로 좌국左國 출신인 좌철左徹이 시조이다. 유명한 인물로 춘추시대 노나라 태사로 『춘추春秋』에 주를 달아 『좌씨춘추左氏春秋(좌전)』를 편찬했다는 좌구명左丘明, 서진시대 문인 좌사左思, 청말 4대 명신으로 양무운동을 이끌었던 좌종당左宗棠 등이 있다. 이에 반해 좌씨佐氏는 명대 성씨에 관한 저작인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처음 보일 뿐 그 시원을 알 수 없다. 좌씨는 하북성 한단邯鄲이나 산동성 임기臨沂, 청도靑島에 주로 살고 있으며, 서남 소수민족 중에도 같은 성씨를 쓰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 성씨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좌씨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고려 충렬왕 시절인 1270년쯤인데, 제주 좌씨 시조로 알려진 좌형소左亨蘇가 탐라 목마장 감목관監牧官으로 부임하여 정착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6세손인 좌한기左漢棄(한나라를 버린다는 뜻)가 세습되던 감목관직을 반납하고 고려에 귀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좌형소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원나라 천관시랑天官侍郞을 역임했다고 한 것이 특히 이상하다. 천관시랑은 당나라 고종의 계후繼后이자 중국 유일의 여황제(무주武周)인 측천무후則天武后 시절 관제를 개혁하면서 육경六卿을 천관天官, 지관地官, 춘관春官, 하관夏官, 추관秋官, 동관冬官으로 나누고, 직관을 분류하면서 천관상서 아래 천관시랑을 둔 것이 최초이다. 이후 중종이 이씨 당나라를 회복한 후 본래 명칭인 이부시랑으로 바꾸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좌형소가 천관시랑을 역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원래 左氏였는데, 佐氏가 생겨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새로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원나라 자손과 차별하기 위해 사람 人변을 붙인 것일까? 좌시우는 왜 다시 바꾸었을까? 성씨를 바꿔야 집안에 인재가 나온다는 설을 믿어야 할까? 궁금하다. 필자의 가설은 이러하다.
혹시 원래 左氏에서 佐氏로 바뀐 것은 원나라 자손이되 제주 출신임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후 좌시우가 다시 바꾼 것은 중국 좌씨의 정통성을 이어받기 위함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가 좌구명의 《좌전》이나 좌사의 《삼도부》를 팔아 얻은 돈을 국채보상운동에 헌납했다는 것은 나름 상징성이 있는 듯하다. 또한 곽지에서 금성을 분리시킨 것은 그곳이 좌씨의 집성촌이기 때문일 수 있다.
금성錦城은 우리나라에서 지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원래 사천성 성도成都의 별칭이다. 성도는 기원전 4세기 이전부터 고촉국古蜀國이 있던 곳이다. 성도 시내에 있는 섬성퇴三星堆 유적이 바로 그 증거이다. 고촉국의 초대 군주 잠총蠶叢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양잠을 시작하여 비단을 세계 최초로 직조하기 시작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금성이란 이름을 얻었다. 성도는 촉의 도읍지로 천부지국天府之國이란 별칭대로 사계절이 분명하여 곡식 재배에 적합하고 물자가 풍부하며, 무엇보다 외부에서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좌사의 《삼도부》을 소장하고 있던 좌시우는 분명 촉도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금성'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물론 지금은 금성리 웃동네 남쪽에 위치한 '잣ᄆᆞ를', '잣ᄆᆞ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잣담이 성처럼 쌓였는데, 비단과 같이 아름답다는 뜻에서 지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