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전남 목포시 석현동 거리에서 동명원 피해생존자 김애정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그곳에는 남성들만 있지 않았다. 여성도 있었다. 불법 납치·감금·강제노역·폭행·암매장으로 점철된 대한민국 집단수용시설 인권침해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서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2기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피해 확인) 결정을 받은 13개 집단수용시설 사건 피해자 1105명 중 여성은 34명뿐이다.
한겨레는 두 번에 걸쳐 그동안 조명받지 못해온 집단수용시설 여성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싣는다. 한 명은 전남 무안의 민간위탁 수용시설 동명원에서, 또 한 명은 정부가 직접 설립한 서산개척단에서 상상하기 힘든 인권유린과 학대를 당했다. 연내 출범 예정인 3기 진실화해위에서 젠더 폭력을 직권조사 범위로 명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집단수용시설 내 젠더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몰래 나를 묻어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참고 지냈느냐고 묻자,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손으로 휴지를 뽑아 들었다. “맞아서 혹시라도 죽으면…그러면 안 되잖아요.” 정말로 살해당할지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들은 시설 안에 묻혀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살아서 나가야 했다.
한겨레는 지난달 9일 전남 무안 바닷가에서 무임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노예 소년공들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전남 무안의 부랑아 수용시설 동명원이 세운 쌀포대 원단을 짜는 공장에 감금된 채 폭행에 시달리며 주야 12시간 교대로 직조기를 돌리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소년들이 성인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도 탈출을 꿈꾸었고, 해안을 따라 산을 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자유를 찾았다.
지난달 21일 전남 목포시 석현동 전남장애인옹호기관에서 동명원 피해생존자 김애정씨가 자신을 지원해온 인권단체 활동가 이기림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경태 기자
바닷가 노예 소년공들이 일하던 공장과 2.7km 떨어진 곳에는 노예 소녀들이 살았다. 동명원 식당에서 원생들의 밥을 해주는 아이들이었다. 동명원과 동명원의 공장에서 소년들이 하나둘씩 1년, 2년 또는 4년 만에 기어코 도망을 쳐도, 노예 소녀는 꼼짝도 못 했다. 키 140cm 이하의 왜소증 장애로 중복장애 2급(지체장애 6급,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소녀였다. 몇 번 탈출을 시도했다가 잡힐 때면 정신과 폐쇄병동에 갇혔다. 체념하고 살았다. 그 세월이 무려 25년이었다.
그때 그 소녀, 동명원 피해생존자 김애정(49)씨를 지난달 21일 목포시 석현동 전남장애인옹호기관에서 만났다. 전동휠체어에 앉아 인터뷰에 응한 애정씨는 뜻밖에도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겠다고 했다. 비참했던 과거를 직시하며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눈치였다. 지적 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하나, 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어눌하지만 분명하게 답을 이어갔다. 첫 일성은 강력했다. “동명원은 그동안의 악행에 관해 사죄하고 시설을 해체해야 해요. 경찰은 부지를 수색해 암매장된 분들을 꺼내드려야 합니다. 유해발굴이 필요해요.”
경찰 출신 김춘식이 1972년 목포시의 인가를 받아 운영을 시작한 동명원은 1981년 전남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로 옮겨와,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다. 이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애정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눈앞에 악마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충격과 비탄을 넘어 분노가 몰려오다가, 나중에는 어이가 없어졌다.
지난달 21일 전남 목포시 석현동 전남장애인옹호기관에서 동명원 피해생존자 김애정씨가 인터뷰에 응하다 웃고 있다. 고경태 기자
1976년 무안군 해제면에서 태어나 13살이던 1989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뒤 목포역 앞에서 단속반원에 납치돼 동명원에 갇힌 애정씨는 2014년 8월15일 광복절날 ‘해방’될 때까지 25년간 물건이나 조선 시대 노비 같은 취급을 당했다. 설립자 김춘식이 1987년 죽은 뒤 대를 이어 시설장(원장)을 지낸 김종금(김춘식의 부인, 1932년생 추정)과 김승호(큰아들, 1957년생), 그리고 김승호의 부인 김설(1958년생)은 가해자이자 착취자였다. 그들은 애정씨에게 △무임 강제노동 △상습 폭행 △안마 등 성접촉 강요 △상습 감금 △정신병원 강제입원 △강제피임 시술 △상습사기 및 횡령 등의 범죄를 자행했다.
“입소하고 2년 뒤부터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저녁 7시 반까지 식당에서 일했어요. 70여명의 원생이 먹을 밥과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와 청소를 했죠.” 일하는 사람은 두세 살 터울의 나아무개씨(지적 장애인)와 애정씨 둘 뿐이었다. 애정씨는 월급 한 푼 못 받았지만, 시설장 부인 김설은 자신이 조리원으로 일하는 것처럼 속여 목포시로부터 보조금을 타 먹었다. 김종금의 사택에서 식모 일도 했다. 고추밭, 마늘밭 등 농장 일도 거들어야 했다. 10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월급을 달라”고 했다. 김승호는 “세끼 밥 주면 그게 월급 아니냐”며 조롱했다.
2009년 애정씨는 임신을 했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임신 7개월이 됐을 때 애정씨는 무안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에 강제 입원이 됐다. 숨겨야 할 존재로 치부됐다. 김승호는 수용자의 임신 사실을 목포시에 신고하지 않았고, 애정씨와 유일하게 연결된 외부인이었던 사촌 언니에게 산부인과 병원비를 납부하게 했다. 아기를 낳자 애정씨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아동시설로 넘겼다. 아기 이름도 김승호 맘대로 지었다. 아기를 빼앗긴 애정씨는 한동안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다. 그로 인해 우울증 증세를 보이면, 또 정신과 폐쇄병동에 집어넣었다.
지난달 21일 전남 목포시 석현동 전남장애인옹호기관 사무실에서 동명원 피해생존자 김애정씨가 자신을 지원해온 인권단체 활동가 이기림씨와 포즈를 취했다. 고경태 기자
피임 시술(루프 삽입술)도 강제로 받았다. 동명원에 있던 여성 장애인 9명도 몽땅 이 시술을 받았다. 동의 같은 건 구하지도 않았다. 이후 입소인 간 성관계를 막는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있는 2층 방 밖으로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 자물쇠가 채워졌다. 전깃불도 옆 방에서만 켤 수 있게 했다. 캄캄한 방에서 자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손을 더듬거려 세숫대야를 덮어놓은 양동이를 찾아 볼일을 봤다. 김승호는 애정씨에게 틈만 나면 안마를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주먹으로 온몸을 때렸다.
그리고 살인과 사체유기, 암매장. 사라져 땅속에 묻힌 이들이 도합 이십여명은 되고도 남을 거라고 애정씨는 믿고 있다. 동명원은 인권유린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부산의 형제복지원과 영화숙·재생원, 경기도의 선감학원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군대식 기합으로 다스려지는 곳이었다. 1층 남자 방에 있던 ‘온건’이라는 아이는 점호를 받다가 맞아 죽었다고 했다. 김승호 사택에서 일을 도와주던 ‘유성화’는 물에 빠져 죽었다고 들었다. 사망자는 원생 서류에 ‘도망자’로 기재됐다. 한데 김설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한답시고 애정씨에게 음식을 준비하도록 해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줬다. 김설은 원생들이 암매장된 산을 향해 절을 하며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우리 자식들 잘되게 해주세요.” 스릴러 같은 블랙 코미디였다.
목포에 있는 유달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사업보고회에 참석해 포즈를 취한 김애정씨. 김애정씨 제공
그 자식들, 그러니까 김승호·김설의 두 아들도 대를 이어 애정씨를 착취했다. 그들이 쓴 핸드폰 요금을 10여년에 걸쳐 내느라 동명원을 나와서도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김설은 두 자녀의 핸드폰을 수시로 애정씨 명의로 개통한 뒤 요금을 내지 않고 버텼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에게 요금 독촉이나 압류 등을 하기 어려운 점을 이용한 듯했다. 그 요금 누적 액수가 500만원이나 됐다. 횡령 범죄였다. 통신가입 계약서를 애정씨가 쓰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사고 싶은 거 안 사면서 최근에야 다 갚았다.
반격의 시간이 돌아왔다. 동명원에서 나온 2014년, 인권활동가들의 도움으로 전남장애인인권센터에 동명원에서의 학대 사실을 신고했다. 경찰은 수사에 착수해 결국 동명원은 기소됐다. 2017년 1월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김승호와 김설에게 근로기준법 위반과 사기, 업무상 횡령 혐의 등으로 각각 1년2월과 10월의 징역형을 선고했고, 항소가 기각돼 원심이 확정됐다.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민사소송도 걸었다. 목포지원은 같은 해 8월 사회복지법인 동명원과 김승호에게 공동으로 8800여만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허망한 승리였다. 1년짜리 징역형은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김승호가 기소되자 목포시는 징계 등 별도 행정조치를 하지 않았다. 자진 퇴사 처리됐다. 20년 넘는 강제노동을 했음에도 민사 판결은 고작 2006년부터 9년간의 최저임금과 위자료만 계산했다. 그마저도 10원 한장 받지 못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김승호는 신용불량자라 했고, 동명원은 법인 재산이 없다며 버텼다. 압류와 채권추심 시도도 실패했다.
이제 애정씨는 지역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준비 중이다.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동명원 부랑아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4명 중 1명에 애정씨 이름을 올렸다. 김종금과 김승호, 김설의 뒤에는 국가가 있었다. 경찰·공무원을 동원해 아동들을 단속해줬고, 시설 신축비와 운영비 등을 지원한 것은 국가였다. 그 국가는 동명원이 감금·강제노역·폭행·살인·사체유기 등 온갖 불법행위와 범죄를 저지를 때 눈을 감았다.
“제 인생 물 건너갔지만, 보상은 받고 싶어요. 돈을 받으면 사회에 기부도 하고 싶어요. 제일로 하고 싶은 건 차 한 대 뽑는 거예요. 운전면허도 딸 겁니다. 하하하.”
광주 전남도청 앞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김애정씨(왼쪽서 세번째). 김애정씨 제공
젖은 눈으로 25년간 겪은,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던 애정씨가 활짝 웃었다. 처음 동명원에서 나와 지역 인권운동가들을 만났을 때도 진실을 모두 말하지 않았다. 2017년부터 애정씨를 도왔던 이기림(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씨는 “어릴 때부터 동명원에서 생활하고 워낙 가스라이팅을 당하셔서 폭력이 폭력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고 했다 애정씨는 본인이 겪은 일을 순차적으로 털어놓았다. 임신과 강제 피임 시술 이야기는 3년쯤 지났을 때 마지막으로 말했다.
애정씨는 2014년 동명원에서 나온 뒤 자립에 성공했다. 그나마 본인 통장에 꽂히던 장애인연금으로 200만 원짜리 사글셋방을 구했고, 지금은 20평짜리 국민임대주택에 살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다.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서, 올해 목포에 있는 제일정보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됐다. 학생증을 받았을 때는 감격해서 울고 말았다. 장애인 편의시설 모니터링을 하는 장애인 일자리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시설에서 나왔거나 나오려는 이들의 상담도 해준다. 공부하는 보람, 일하는 기쁨이 애정씨를 생동하게 한다.
애정씨의 꿈은 시설에서 나온 이들이 지역살이 자립 훈련을 할 수 있는 ‘체험 홈’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동명원 수용자들이 사회에 나와 자립하도록 돕고 싶다. 동명원은 아동수용 시설에서 성인시설로 한 차례 변화를 겪고, 2013년부터는 노숙인 보호시설 간판을 달고 운영되고 있다. 현재 40여명이 수용돼 있다. 애정씨가 잘 아는 사람도 여럿 있다. 40년 가까이 동명원에서 못 빠져나온 이들이다. 애정씨는 최 아무개, 나 아무개, 박 아무개씨를 거명하며, 이 중 두 명은 과거 빨래 널러 밖으로 나갔다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붙잡혀 온 이들이라고 했다. “자기의사 표현이 어려운 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셈이에요. 동명원을 빨리 폐쇄하고 거기서 나온 이들이 사회로 나와 살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합니다. 저도 힘을 보탤 거예요.”
한겨레는 지난달 29일 동명원의 현 시설장 신아무개씨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애정씨가 동명원에서 당한 인권침해 사실을 언급하자 “그건 이미 법원에서 판결이 난 사항이라 다툼의 여지가 없다. 안타깝고 슬프고,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말했다. 왜 동명원이 손해배상 책임을 이행하지 않냐고 하자 “법인은 돈이 없다. 김승호 등 설립자가 책임져야 할 일인데 난감하다”고 말했다. 현재 시설 운영이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해 9월까지 시설장을 지내다 이사장이 된 정제욱씨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교회 목사다. 정제욱 이사장과 신아무개 시설장은 모두 2000년대부터 동명원에서 일하면서 애정씨를 지켜봐 왔다. 반세기가 넘은 동명원의 맥은 지금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