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광복 80년 전야의 일본어 연극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2025. 8. 1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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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국어의 시간'. /극단 백수광부

광복 80주년을 맞던 밤, 서울 종로 거리는 떠들썩했다. 그중엔 연극 ‘국어의 시간’의 작가와, 막 분장을 지우고 합류한 극단 백수광부의 단원들도 있었다. 뒤풀이 자리는 공연의 여운으로 뜨거웠다.

연극 ‘국어의 시간’은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194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은 일본어 교사와 학생, 학부모, 그리고 총독부 관리 등인데, 모두 당시 조선인이다. 그러니 제목의 ‘국어’는 일본어다. 그래서 공연도 다 일본어로 진행된다.

연극을 쓴 사람은 일본 극작가 오리 기요시씨다.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은 건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전하기 위함이었을 터. 따라서 배우들은 2년 동안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일본어 연기보다 더 흥미로운 건 입체적인 인물상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보아온 인물들과는 다르다.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다. 첫 장면에서 총독부 관리에게 당차게 항의하던 신입 교사는 나중에 일본인 교장의 첩이 되고, 시시껄렁해 보이던 교사는 조선어학회에서 은밀하게 활동했음이 밝혀진다. 총독부 관리의 숨겨진 전사(前史)는 더 흥미진진하다. 모두 남모를 사연과 비밀이 있다.

연극 '국어의 시간'. /극단 백수광부

극작가 오리씨는 이 작품을 2013년 일본에서 처음 발표했다.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제의 만행에 대해선 반성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질문이 작가를 따라다녔다. ‘과연 내게 이런 작품을 쓸 자격이, 당시 조선인들의 친일에 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마침 옆자리에 앉은 작가에게 짐짓 취한 척 물었다. “왜 이 작품을 썼나요?” 한참 단어를 고르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실제 그 일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 ‘당사자성’은 중요한 문제죠.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했어요. 위선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들의 죄를 감싸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에 마음을 쓰는 일에는 국경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는 그의 대답을 듣고 맞는 광복절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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