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탈북민 리포트- 경계는 넘었지만 문턱은 남았다] 3. 하나원 나서니 언어부터 장벽
남한 정착 기초적 틀 마련 불구
행정 등 일상 어려움 지원 한계
일반어 38% 전문어 66% 차이
태도 등 문화적 소통 ‘거리감’
생계 불안·노동문화 적응 실패
평균 근속기간 38개월 채 안 돼
실업률 일반 국민 대비 2배↑
학력 대학 재학 이상 비율 저조
임금 수준·직종 등 선택 불리
탈북민 3명 중 2명 “말투·생활방식 달라 차별 경험”
남한 땅을 밟은 탈북민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는 건 ‘자유’가 아니다. 그들을 맞이하는 건 최대 90일간 이어지는 국가정보원의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조사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누구인가’를 증명해야 한다. 고향을 버리고 온 이들의 진짜 이야기는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낯선 시스템에 흡수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경기 안성과 강원 화천에 위치한 ‘하나원’. 탈북민은 이곳에서 12주, 400여시간의 정착 교육을 받는다. 한국어 교재와 직업 교육용 안내서가 차곡차곡 놓여 있다. 강사들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강의실 밖 현실은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다.
송종섭 남북하나재단 일자리지원부 팀장은 “진짜 정착은 하나원을 나선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곳은 훈련소일 뿐, 사회는 또 다른 전쟁터다. 송 팀장은 “탈북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언어보다 ‘문화’예요. 여성 인권, 대화 방식, 일하는 태도… 남한은 모든 것이 다르게 움직이는 사회입니다. 적응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죠”라고 강조했다.

■ 집보다 필요한 건 ‘온기’…정착 지원, 여전히 낯선 현실
1997년 정부는 ‘북한이탈주민법’을 제정했다. 탈북민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하나원, 하나센터, 지방자치단체 등 이들의 정착을 위한 틀은 갖췄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낯설고 비좁은 틀에 끼워져 있다.
하나원에 입소한 탈북민들은 한국어와 법률, 민주주의 원리, 심리안정 교육 등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수업’을 받는다. 의료서비스도 제공된다. 특히 북에서 생존에 급급해 치아 하나 돌볼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생애 처음 받아보는 치료라 큰 호응을 얻는다.
2023년 화천 하나원에는 ‘하나마음 쉼터’가 생겼다. 심리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조용한 숲 너머, 닫힌 마음을 열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반기 42회, 800여명이 참여했다. 탈북민 마음의 상처와 정서적 회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교육이 끝나면 또 다른 낯선 세계가 기다린다. 본인이 희망한 지역을 중심으로 최초 1회에 한해 국민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다. 이후엔 주거지 근처의 하나센터가 이들 곁에서 주거와 취업, 심리지원 등 실질적 도움을 준다. 하지만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남한에서의 삶의 첫 단추를 꿴다.
이 모든 과정은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일 뿐이라는 것이 문제다. 복잡한 행정, 서류, 대면 면접, 낯선 금융 시스템. 남한의 일상은 탈북민에게 또 다른 ‘암호’로 다가온다. 국가가 제공한 집보다, 사람의 온기가 먼저 필요한 순간은 많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진짜 공간’은 문턱 저 너머에 있다.
■ “같은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요”… 문화·언어 장벽
남한 땅에 서면, 많은 탈북민이 ‘같은 말을 쓸 수 있다’는 막연한 안도감을 품는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는다. 같은 한글을 쓰지만 단어의 결이 다르고 억양 속 숨은 의미가 다르다. 말끝 하나가 의심을 불러오고 사소한 표현 하나가 상처가 된다.
남북하나재단의 홍천 귀농귀촌 프로그램에서 만난 A씨(50대·함경북도 출신)는 “남한에 정착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가 쓰는 말을 못 알아들어 다툰 적이 있어요”라며 “남한 사투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문화로 여기며 대부분 웃고 넘기지만, 북한 말은 묘한 시선이 따라옵니다”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래 묵힌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
많은 탈북민이 ‘같은 민족, 같은 언어’라는 믿음으로 한국행을 결심한다. 남한에서도 자신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80년의 분단 현실은 그 믿음을 천천히 그리고 냉정하게 허물어냈다. ‘같은 민족’이라는 말은 종종 장식에 그쳤고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이라는 시선이 따라다닌다.
남북하나재단(2024)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이 차별을 경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말투·생활방식·태도 등 문화적 소통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실제 남한의 표준국어대사전(1999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2006년)을 비교해보면 일반어는 38%, 전문어는 66%의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결국 보이지 않는 벽이 되고 탈북민과 남한주민 사이에 문턱을 만든다. 그리고 그 문턱 앞에서 여전히 그들을 위축되게 만든다.
■ 남한 정착의 어려움…통계에서도 드러나
2024년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조사에 따르면 ‘차별과 무시를 경험했다’고 답한 이들이 꼽은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소통 방식의 차이’였다. 응답자의 66.7% 즉 셋 중 둘이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긴 거리’를 느낀 것이다.
경제적 자립의 벽도 높다. 북한이탈주민 10명 중 9명(90.7%)이 직업교육훈련을 받았지만 절반에 가까운 47%는 배운 분야에서 일한 적이 없다. 그 이유로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거나 조건에 맞는 회사가 없다’는 답이 26.8%였다.
직업교육훈련을 통해 제빵 기술을 배웠다는 B(40대)씨는 “배워도 쓸 데가 없어요. 경력 없으면 안 뽑는다는데, 그럼 언제 경력을 쌓습니까”라고 하소연한다. 최근의 구인공고에는 어김없이 ‘경력자 우대’ 조건이 붙어있다.
탈북민들은 제조업과 숙박·음식업 분야에 주로 취업했다. 단순노무 종사자가 27.4%, 서비스업 종사자가 22.4%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근속기간은 극명하게 갈렸다. 탈북민의 평균 근속 기간은 37.7개월로 일반 국민(76개월)의 절반 수준이다. 탈북민들이 직장에서 3년 이상 버틴 경우가 34.1%였지만, 4개월도 채우지 못한 경우가 24.2%나 됐다. 탈북민의 실업률은 6.3%로 일반 국민(3.0%)보다 두 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이같이 근속 기간이 짧은 이유로는 생계 불안, 낮은 임금, 임시직 선호, 남한 노동문화 적응의 어려움 등이 꼽히고 있다. 탈북민들은 ‘먹고, 사는’ 근원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투를 벌인다.
■ 취업·학업 장벽 여전…“자유롭지만 부담 큰 남한 생활”
탈북민들은 초기에 기초생활수급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자아실현이나 진학, 취·창업을 시도하는 순간부터 또 다른 장벽에 직면한다. 외래어가 많은 행정 용어나 생소한 시스템, 무한 경쟁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좌절을 겪기도 한다. 특히 강원도는 타지역에 비해 일자리가 적어 탈북민들이 취업하기도 쉽지 않다.
춘천 해솔직업사관학교에서 만난 C(20대)씨는 “남한에서는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 자유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고 때론 행복이 뭔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농촌으로 이주해 자립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농지를 구입하거나 정부 보조를 받기 위해선 ‘농업경영체’ 등록이 필요하고, 일정 규모의 농작물 재배 경험이 요구된다. 기반이 없는 탈북민에게는 시작조차 어려운 일이다.
청소년이나 청년층의 경우 학업도 큰 도전이다. 2024년 북한이탈주민 조사에 따르면 만 34세 이하 탈북민들의 37.6%가 4년제 대학 이상의 교육 수준을 희망했다. 하지만 교육 제도가 다르고 기초 학력이 부족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이에 따라 학력 수준의 격차도 크다. 탈북민의 남북통합 기준 중·고졸 이하가 64.2%, 대학(4년제) 재학 이상이 19.1%다. 한국 전체 25~64세 성인 인구의 고졸 이상 비율이 93%, 대졸 이상이 55%인 점을 고려하면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크다. 이는 곧 취업률과 직종, 임금 수준에 직결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김기찬 해솔직업사관학교 교장은 “북한이탈 청소년들은 학습 의지는 높지만, 남한 학교의 문화와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거나 낙오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희 기자 ballove@kado.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서초동 사저에 남겨진 반려동물 11마리…김건희 측근들 돌보는 중 - 강원도민일보
- 양궁 국가대표 장채환, SNS에 극우 성향 ‘대선 조작’ 게시물 - 강원도민일보
- ‘손흥민 딥페이크’로 강원랜드 사칭 불법도박 홍보… 경찰 수사 착수 - 강원도민일보
- ‘불친절 논란’ 속초 오징어 난전 영업정지 처분…상인들 자정 결의 - 강원도민일보
- 매봉산 '바람의 언덕' 농번기 관광객-농민 좁은 길 때문에 마찰 - 강원도민일보
- 강원FC 내년 홈경기 강릉에서만 열린다 - 강원도민일보
- 양양 호텔서 발견된 뱀 알고보니 ‘멸종위기종’ - 강원도민일보
- 춘천 ‘감자빵’ 부부 대표 이혼 공식화…“각자의 길 응원” - 강원도민일보
- ‘극한직업’ 최반장 배우 송영규씨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 - 강원도민일보
- 신화 이민우 “양양서 아이 생겨 태명 ‘양양’”… 약혼자 임신 공개 - 강원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