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3법’이 기대되는 또 하나의 이유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방송법 제4조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하여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 처벌 조항도 있다. 부당하게 규제하거나 간섭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박근혜 정부 시절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한국방송(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월호 참사 관련 정부 비판 보도를 무마한 사실이 드러나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방송법에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 규정을 둔 것은 언론 자유를 보장한 헌법에 비춰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정치권력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방송에 개입한다면 어떻게 방송사가 언론 자유를 지킬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이 조항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방송 자유를 지키는 안전판인 셈이다.
문제는 방송사 내부에서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훼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동안 정치권력의 하수인들이 방송사 사장 노릇을 하며 구성원들의 제작 자율성을 짓밟는 일을 무수히 목도했다. 그들은 정치권력의 주구가 되어 방송 자유를 무참히 훼손하고도 ‘경영권’ 뒤에 숨어 처벌을 피해 가곤 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윤석열 치하의 한국방송이 딱 그랬다.
‘윤석열의 술친구’로 알려진 박민이 한국방송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한국방송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잘나가던 간판 시사프로그램이 예고도 없이 폐지됐다. ‘윗선’의 지시로 외부 진행자가 갑자기 교체되는 일도 벌어졌다. 제작진은 물론 시청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프로그램 개편 전 제작진과의 성실한 협의’ 등을 규정한 단체협약과 편성규약은 무용지물이었다. 제작·편성의 자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노사 합의로 마련된 내부 장치가 ‘낙하산 사장’ 말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무력화된 것이다. ‘파우치 사장’ 박장범 체제에서도 공들여 만든 시사프로그램이 결방되는 일이 잇따랐다.
방송 노동자들에게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평가받는 ‘보도 책임자 임명동의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방송 편성규약과 단체협약에 따라 2018년부터 실시돼온 제도임에도 ‘친윤 사장’ 박민과 박장범은 노조와 기자협회 등의 임명동의 요구를 거듭 묵살했다. ‘인사권 침해’를 이유로 들었지만, 주요 보직을 ‘알아서 길 만한’ 충복들로 채우려는 의도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야 손발을 맞춰 정권에 ‘알아서 기는’ 방송을 헌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장 한명 바뀌었을 뿐인데 방송사의 논조가 180도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방송사의 ‘내적 자율성’이 취약하다는 방증이다. 사장이 마음만 먹으면 보도와 제작, 편성을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정권이 교체되면 집권 세력이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서라도 방송사 사장을 갈아치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터가 ‘정권 나팔수’로 전락해가는 걸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던 한국방송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너무 무기력하다”는 탄식이 나왔다.
지난 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방송법 개정안은 방송사 구성원들의 제작 자율성을 보장할 장치들을 여럿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노사 동수의 편성위원회 설치 의무화 및 권한 강화, 편성규약 위반 시 처벌 조항 신설, 보도 책임자 임명동의제 법제화 등이 그 예다. 적어도 방송 ‘내용’에 있어서는 경영진이 전횡을 일삼지 말고 방송 종사자들의 의견을 들으라는 것이다.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 선임 과정에서 정치적 후견주의 해소를 뼈대로 하는 ‘지배구조 개선’이 공정방송을 위한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내적 자율성’은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방송법 개정안에 담긴 방송사 내부 자율성 보장 장치들이 진작 마련됐더라면, 설령 ‘친윤 낙하산’이 사장으로 왔더라도 한국방송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정권 나팔수’가 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8월 임시국회에서 ‘방송 3법’ 중 나머지 2개 법안(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적 틀이 완성된다. 민주적 참여의 길이 열린 만큼,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려는 방송 종사자들의 의지와 실천이 더욱 중요해졌다. 제도는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입김에서 벗어나 오로지 시민의 관점에서 공정방송을 실천하는 것만이 수십년을 이어온 ‘방송 민주화’ 투쟁의 대의를 온전히 살리는 길이다. 시민의 신뢰가 굳건해야 혹여 방송 장악 미몽을 가진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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