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천년 진주, 진주목 이야기] 들여다보기(4)

경남일보 2025. 8. 1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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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타운 믿음이 깃든 곳, 진주
지리산과 남해를 접한 진주목은 다양한 신앙과 종교가 발전했다. 삼국시대부터 지리산은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성모 신앙이 생겨났으며, 오늘날까지 그 신앙이 끊이지 않고 내려온다. 신라 시조 혁거세를 낳은 선도성모가 이곳에 머물렀고,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도 지리산에 자리했다고 한다. 성모는 나라를 지키는 산신으로 여겨졌다. 노고단에는 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모신 남악사가 있었고, 천왕봉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신 성모사가 세워져 있었다. 지리산의 성모 신앙은 지모신 신앙을 바탕으로 성립했다. 지모신 신앙은 풍년을 기원하면서 하늘과 땅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았다. 또 성모 신앙은 무격신앙과도 얽혀지면서 산악 숭배 신앙과 깊게 연결됐다. 지리산 성모는 천왕·천왕할매·마고할매·마야부인 등으로도 불렸다.

지리산 일대에는 신라 때부터 중요한 사찰이 창건됐다. 신행선사(704~779)가 머문 단속사, 진감선사 혜소(774~850)가 중창한 쌍계사를 들 수 있다. 이 두 절은 고려 때 진주목의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지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단속사는 대각국사 탄연(1069~1158), 진각국사 혜심(1178~1234), 최우의 아들 만종 등이 주지를 맡아 큰 영향력을 끼쳤다. 조선 초기에도 많은 사찰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단속사와 쌍계사가 중요 사찰로 소개되고 있고 촉석루 뒤에 용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10여 개 이상의 크고 작은 절이 소개되고 있다. 이 사찰들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장소이자 사회적·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호국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사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각과 비석. 사진=국립진주박물관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학·천주교·개신교 등 새로운 종교가 진주에 전파됐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진주에는 1880년대 전래해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했다. 1906년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 진주에 대교구가 세워졌다. 이후 천도교는 진주에서 활발한 소년운동·부인운동 등을 펼쳤다. 천주교는 19세기 중반부터 진주 지역에 전파돼 순교자를 냈다. 1883년 문산에 소촌공소가 설립됐으며, 1937년 지금의 성당 건물이 완공됐다. 개신교는 1905년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진주 지역에 전래됐다. 1905년 호주인 선교사 휴 커를(한국명 거열휴, 1871~1943)이 진주교회, 배돈병원, 광림학교 건립에 이바지했다. 이처럼 새로운 신앙은 근대기 진주 지역의 교육, 의료, 사회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사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 사진=국립진주박물관

믿음과 관련된 문화유산 중 주목되는 것은 사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다. 1387년(우왕 13)에 세워진 이 비석에는 4100명의 신도가 침향목을 묻으면서 미륵불이 올 때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려 큰 서원(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해안 지역에서는 미륵불의 세계에 다시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묻는 매향 의식을 거행하고 이를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20여 기의 비석 중 사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가 매향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 당시 사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비석은 1378년 진주·하동 침범, 1383년 남해 침범 등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세워졌다. 이듬해인 1388년에는 이성계가 조정의 요동 공략에 반대해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국왕을 내쫓은 사건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비석에는 정치적 격변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세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내세에서 왕생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 비석의 내용 중 오늘날에도 기억할 만한 문구가 있어 소개한다.

무릇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수행(실천)과 서원(간절한 바람)이 서로 함께 도와야 합니다. 수행만 있고 서원이 없으면, 그 수행은 반드시 의지할 데 없이 홀로되어 어긋나게 됩니다. 서원만 있고 수행이 없으면, 그 서원은 헛되게 됩니다.

위의 문구는 종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행(실천)과 서원(간절한 바람)이 서로 함께 도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전란과 사회적 불안에 고통받던 당시 사람들은 미륵불의 도움을 받아 현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실천과 간절한 바람이 서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면도 있다 하겠다. 오늘날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우리들도, 이와 같은 실천과 간절한 바람이 서로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문화유산을 다시 보게 된다.

이효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 탁본. 사진=국립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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