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인현동의 기억

인천 토박이인 나에게 ‘인현동’은 주말마다 나들이를 떠났던 동네였다. 교회 예배를 마친 후 오갔던 동인천역 지하상가, 줄지어 있던 즉석 떡볶이 가게와 놀거리 많던 인천학생문화회관. 인현동 곳곳에서 보냈던 추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30여 년 전 그곳에서 믿기 힘든 대형 참사가 발생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인천기독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나의 어머니는 ‘인현동 화재 참사’ 발생 당시의 기억을 들려주곤 했다. 앳된 얼굴을 한 학생 수십 명이 들것에 실려 연이어 응급실로 들어왔던 장면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십여년 후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마주했던 날에도 1999년의 그날을 함께 불러왔다.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내온 이가 있다. 고(故) 이지혜양의 어머니 김영순씨다. 이양은 인현동 화재 참사가 발생했던 1999년 10월30일 상가건물 2층 호프집에서 ‘일일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다. 인천 중구는 참사 이후 관련 조례를 제정해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 근거를 마련했지만, 이양은 ‘종업원’으로 분류돼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김씨가 다시 딸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이양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다.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가 이어졌다. 호프집에서 발견됐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은 ‘비행청소년’이라 불렸고 학교는 사망자에 대한 퇴학 조치를 고려하기도 했다. 이양은 피해 규모를 확산시킨 종업원들과 동일한 신분이 돼 ‘가해자’로 여겨졌다.
김씨를 비롯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인천시 중구 인현동 화재사고 관련 보상조례’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거나, ‘사실상 폐기된 조례’라는 이유 뒤에 그날을 기억하는 가족들이 있다.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에도 많은 참사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양의 사망으로부터 26년이 흐른 지금, 사회적 참사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송윤지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sso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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