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1) 상해 임시정부 주역 활동-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상해 임정 출범 결정적 역할

김명식 기자 2025. 8. 1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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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장병준·한남수 상해 임시정부
제1회 의정원 회의서 전라도의원 선출
이후 정광호 박계천 박진 송식 등 당선
지역 출신 임정 수립·운영 주도적 참여

일본 유학생 지식인 광복군 등 배경 다양
김철 재정 후원 임정 수립에 큰 역할
김재호-신정완, 김철-신혜순은
부부가 ‘전라도 의원’으로 독립운동

장병준·정광호·한남수 3·1운동 주도
일제 체포망 벗어나 상해 망명 임정 참여
안봉순·송식·윤덕홍은 광복군 출신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 정신 이어져
1919년 3·1운동의 거대한 독립 열망을 토대로 그해 4월 11일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에서 전라도(광주·전남) 출신 인사들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임시정부 운영에 큰 역할을 한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들./국가기록원

1919년 3·1운동의 거대한 독립 열망은 국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러시아와 국내(한성),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국 수립 움직임이 일어났고 각각 임시정부가 만들어진다. 한반도는 물론 한인들이 있는 해외에까지 파급된 한민족의 독립운동의 열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다.

특히 상해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10일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 안에서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다. 이 임시의정원은 상해에 모인 독립지사 29인의 회의로 한국사 최초의 의회 조직체로 평가받아 지금의 대한민국 국회의 기원이 된다.

이날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내무, 외무, 법무, 재무, 군무, 교통 등의 행정부서를 설치하면서 다음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상해 임시정부는 나아가 다른 지역의 임시정부와 통합해 그 해 11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광주·전남) 출신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임시정부 운영에 큰 역할을 한다.
상하이 임시정부 '1호 청사' (중국 상하이 샤페이루, 현 화이하이중루의 서양식 건축)./국사편찬위원회

◇부부가 임정원 의원

1919년 4월 10일 저녁 7시 중국 상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 위치한 양옥집에서 29명의 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가 열린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철, 장병준, 한남수 등이 전라도의원으로 당선된다. 이후 최혜순, 신정완, 정광호, 박계천, 박진, 송식, 문덕홍 ,김재호, 안봉순 등의 전라도 의원들이 임시의정원 구성원으로 활동한다.

김철(함평·1886~1934)은 임시정부의 전라도출신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재정적인 후원을 통해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임시정부에서 군무장, 재무장, 국무원 비서장등 국무위원도 역임한다. 1932년에는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한 분으로 꼽힌다. 김철은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고향에 은거하던 중 조석총독부에서 일제통치에 협력해 달라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단호히 뿌리치고, 조선광복을 위하여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김철은 부부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하다. 부인 최혜순(광주·1900~1976)은 전남 도립병원 간호사 출신으로 1922년 2월 8일 제 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임시의정원의 전라도의원으로 선출된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여성의원이 처음으로 뽑힌 건 최혜순이 처음이었다.

김재호(나주·1914~1976)와 신정완(나주·1916~2001)도 부부 독립운동가다.

김재호는 1919년 3·1운동때 향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중국으로 망명한다. 1941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의 대원으로 활동하다 김구의 소명으로 중경임시정부 선전부의 선전위원이 됐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광복시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한다.

신정완은 1943년 10월 전라도 대의원으로 선출된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의 딸로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했다. 광복후 서울에서 한성화교학교, 숙명여고 등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세워진 일강 김철 선생 동상과 상해 임시정부 청사 재현 건물./남도일보 DB

◇3·1운동 후 일제 피해 망명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배경은 다양하다. 장병준(무안·1893~1972)과 정광호(광주·1895~미상) 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 상해 임정에 합류한다.

장병준은 1919년 3월 18일 고향 무안에서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선도했다. 그 후 상해로 망명해 1927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선임, 독립운동의 통일전선을 위해 힘썼다. 정광호 역시 그 해 3월 광주 독립만세운동 거사 후 일경의 미행감시체포를 피해 인천에서 밀항선을 타고 중국에 도착,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광복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되었으며 6·25당시 납북됐다.

3·1운동 시위에 참여하여 기소된 광주출신 한남수는 4월 8일 상해에 도착해 의정원 의원이 됐다.

◇광복군 활동하다 임정 합류

광복군으로 항일 전장을 누비던 인사들도 있다.

안봉순(순천·1894~1947)은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임정에 참여했다. 그는 1942년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에서 군사훈련 교육을 마치고 서안에서 중경으로 소환되어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어 각종 안건을 심의, 의결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송식(화순·1900~1947)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41년 10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에 선출되어 광복 당시까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윤덕홍(제주도·1902~1949)윤덕홍은 일본 선원으로 근무하다가 상해에서 탈출해 1941년 초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1943년 10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한독당에 입당한 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원으로 근무하다 6월 서무국원을 겸직했다.

또 박진은 (장흥·1897~1968) 1919년 5월경부터 중국 상해에 거주하면서 재 상해 청년단에 가입 활동했다. 1922년 8월에는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1924년에는 상해 한인청년동맹과 한인유학생회에서 활동했고 1923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을 역임했다.

박계천(신안·1885~1960)은 1923년 4월부터 1926년경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김인전은 1910년경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에서 만주로 이동한 김인전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겼고, 제8회 임시의정원회의(1921,3,18)때 의원에 선출됐다.

이렇듯 유학생과 지식인, 청년 활동가,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광주·전남 인사들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일찍이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했다. 임진왜란때 호남은 의병들이 스스로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의 곳간으로 백성을 먹여 살리는 토양이었다. 이런 의병 정신과 물적 토대가 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고스란히 재현된 것이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자문/김재기(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