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병산서원, 한여름의 정취를 느끼다
낙동강이 감싸고 흐르는 하회마을
서원 건축의 절정인 병산서원 만대루
나는 지금 안동 병산서원에 있다. 이맘때 병산서원의 정취는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니다. 배롱나무 꽃이 붉고 낙동강 윤슬은 눈부시다.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의 정취를 가늠해본다. 내가 그 시절 선비라면 이 풍경 속에서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있었을까.


우리 건축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병산서원의 미(美)
25년 전, 처음 여행기자를 시작하며 안동 병산서원을 찾았다. 그때의 전율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복례문을 지나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를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그 아름다움을 말이다. 자연의 경치를 빌려 건축의 한 구성요소로 활용하는 차경(借景)의 미학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뒤로 틈만 나면 병산서원을 찾았다.
“어디 가요?”
“안동이요.”
“안동 어디요?”
“병산서원이요.”
“또 병산서원에 가요?”
“가도 가도 좋네요. 아니, 가면 갈수록 더 좋네요.”

기억난다. 이맘때였다. 병산서원을 처음 찾았던 때 배롱나무꽃이 붉게 피어 있었으니까. 비포장 비탈길을 굽이굽이 돌았을 때, 신기루처럼 보이던 기와의 건물. 배롱나무가 붉은 등을 켠 듯 환하게 지붕을 밝히고 있었다. 화산(花山)의 품에 안긴 병산서원은 한 송이 선홍색 꽃처럼 보였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를 지나게 된다. 만대루 아래로 난 급경사 계단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 지나면 연못이 보인다. 서원에는 대개 연못이 하나씩 있다. ‘새로운 물이 흘러 들어와야 연못이 맑음을 유지하듯이 선비는 항상 책 읽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입교당 양쪽에는 정허재와 동직재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됐다. 입교당 동쪽에 있는 명성재는 원장이 머무는 공간으로 ‘자연처럼 쉼 없이 성실하면 밝아진다’라는 의미를, 서쪽의 경의재는 교수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경을 실천하면 안으로 곧아지고 의를 실천하면 밖으로 바르게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병산서원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넘어,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영남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공론을 이끄는 장으로서의 역할도 해왔다. 1611년 문묘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시지 말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류성룡 선생의 문인이었던 김봉조와 김윤안이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막을 수 있었고, 1792년에는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야 한다는 추존소도 당시 병산서원의 원장이었던 이우가 앞장서 올렸다. 번암 체제공의 유교책판을 봉정사에서 간행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병산서원에서 주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만대루, 낙동강을 정원으로 불러들이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병산서원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 마루만으로 덩그러니 이루어져 있다. 20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크기다. 만대루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만이 구성체의 전부다. 장식적 공간 역시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만대루 현판은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따온 말로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마주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건축가이자 여행작가로 유명한 오기사는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만대루의 존재는 건축의 모범답안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건물로 둘러싸인 마당의 입장에서는 활짝 열린 공간이 되고, 확 트인 전망의 입장에서는 적절하게 닫힌 공간이 되며, 경사지를 잘 활용한 덕에 뛰어난 낙동강의 풍광을 다양한 각도에서 프레임에 담으며 서원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고 평했다.

안동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곳은 만휴정이다. 산불이 경북을 덮쳤을 때, 방염포로 덮는 등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덕에 살아남았다. 만휴정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유진 초이(이병헌)가 고애신(김태리)에게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라고 말한 뒤 악수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송암계곡에 자리한 만휴정은 보백당이 연산군 6년(1500) 낙향해 은거하면서 유유자적하던 정자다. 마흔아홉의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해 쉰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올랐던 보백당. 예순일곱까지 관직에 있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사직소를 올리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무오사화 이후 일흔한 살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만휴정을 짓고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정자로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아슬아슬한 통나무 다리를 지나야 한다. 비틀비틀 다리를 건너 쪽문을 열고 만휴정 대청마루에 앉으니 신세계가 따로 없다. 다른 곳의 정자들은 문을 꼭꼭 닫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만휴정은 활짝 열려 있다. 바람도, 새소리도, 사람의 발걸음도 자유롭게 드나든다. 잠시나마 정자의 주인이 되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회마을도 꼭 가보시라고 권해드린다. 따로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조선시대 대학자인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흘러 하회(河回)라는 지명을 얻었다. 마을 입구부터 차근히 발걸음을 옮기면 하동고택, 남촌댁, 양진당, 충효당 등 세월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들을 만날 수 있다.
하회마을 골목을 따라 거닐다 보면 북촌댁에 발걸음이 닿는다. 하회마을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북촌, 왼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북촌댁은 이 북촌의 중심이다. 큰 사랑인 북촌유거(北村幽居)는 집안의 웃어른인 할아버지가 거주하던 사랑이다.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간 사랑인 화경당(和敬堂)은 경제권을 가진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방이다.

집뿐만 아니라 가문에 깃든 적선(積善)의 전통도 감동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이다. 경상도사를 역임한 류도성은 3년 동안 갈무리해 둔 춘양목을 홍수로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아낌없이 강물로 밀어 넣었다. 북촌댁 사람들은 작은 사랑에 ‘수신와’(須愼窩)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후손들의 교만을 경계했다. ‘수신와’란 움집에 사는 듯이 삼가라는 뜻으로 번듯한 기와집에 산다고 교만하지 말고 어렵게 사는 이웃을 생각해서 언제나 삼가고 자신을 낮추라는 경계의 말이다.

해가 지니 폭염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것 같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하회마을 길을 걸어 부용대로 간다. 부용대에 올라가면 하회마을이 마치 연못 위에 뜬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인다고 한다. 연못 위에 뜬 한 송이 연꽃의 아름다움을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성이다. 올 가을에 다시 안동에 와야겠다. 병산서원의 가을 정취는 또 얼마나 좋으려나. 계절을 느끼며 만휴정 외나무다리를 건너봐야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병산서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려나.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맘모스제과도 찾아보자. 구름에 리조트는 1975년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될 뻔한 한옥을 옮겨와 숙박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계남고택, 칠곡댁, 팔회당재사, 감동재사, 서운정, 청옹정, 박산정 모두 200~4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내부는 현대식으로 꾸며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92호(25.08.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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