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폭력 앞에 무력했던… 세상 모든 심청이들을 위하여
많은 변주 중 가장 현대적인 재해석
국립 해오름극장서 내달 3일 개막
그토록 사랑한다던 딸 심청을, 아비 심 봉사는 어떻게 제 눈 뜨겠다고 산 제물로 팔았을까. 채 피지도 못한 소녀 심청은 어떻게 아비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결심을 한 걸까. 자비를 가르쳐야 할 승려는 왜 가진 건 딸뿐인 가난한 남자에게서 공양미 삼백 석을 뜯어내려 했을까. 용왕의 도움, 왕과의 결혼이라는 판타지 외에 이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할 결말은 불가능한 걸까.

단순한 이야기와 간명한 메시지는 고전의 매력이지만, 현대 관객에겐 늘 질문을 남긴다. 13~14일 전북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제24회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으로 초연한 창극 ‘심청’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깔끔한 대답이자 지금껏 가장 현대적인 동시에 급진적인 심청 이야기의 재해석이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은 극본과 연출을 맡아, 무대와 의상 등 현지 창작진과 함께 대담하고 전복적인 서사와 유럽 무대의 스타일리시함을 가장 전통적 장르인 창극의 안팎에 녹여 넣었다. 국립창극단의 대표작을 만들어온 한승석 음악감독의 작창은 극의 진행에 따라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들의 음률, 리듬과 어우러지며 이질감없이 관객을 휘감는다. 심청가의 눈 대목(판소리의 주요 부분)들을 훼손 없이 옮기면서 전혀 다른 양식적 표현을 가능케 한 놀라운 음악적 성취다. 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과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장 이왕준)가 공동 제작해 3년간 준비한 결실이기도 하다.

검게 눈 화장을 한 소녀 70명이 비명을 지르며 객석 사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어린 심청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이 소녀들은 심청처럼 더 이상 효심의 상징이나 해피엔딩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 부당한 폭력에 노출되고 희생을 강요당했던 세상의 모든 딸들이 된다.
심청전 속 인물들은 조연들까지 동화책 속 평면성을 벗고 각자 욕망에 충실한 입체적 인물들로 되살아났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아비 심 봉사는 딸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게으르게 누워 잠든 아비의 목을 조르려다 심청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심 봉사가 빠진 물은 금붕어를 담은 어항에 불과하고, 몽은사 화주승의 “공양미 300석”은 딸을 파는 것을 정당화하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의 무고한 죽음은 두 번 반복된다. 처음 심청이 죽을 때 아비 심 봉사는 뒤늦게 제 죄를 깨닫고, 군중은 마치 ‘눈 뜬 장님’처럼 감은 눈 위에 그림으로 뜬 눈을 붙이고 좀비처럼 무대 위를 배회한다. 마치 당신도 세상에 만연한 고통에 눈감고 살고 있지 않으냐 묻는 듯하다. 재연되는 죽음 앞에 심 봉사는 괴로워 눈을 감으려 하지만, 화주승은 몸부림치는 심 봉사를 붙잡아 두 눈 부릅뜨고 딸의 죽음을 지켜보게 한다. 하지만 마침내 자유를 얻는 심청의 뒷모습은 추호의 찝찝함도 남기지 않는다. 깔끔한 엔딩이다.
이야기의 매듭마다 울리는 북소리는 이 격정적인 서사를 이끌어가는 엔진과 같다. 과감한 라이브 영상의 사용은 장단점이 분명하다. 대극장 무대 위에 상하·좌우로 열리는 영사막을 활용해 무기력한 심 봉사, 멍들고 피 흘리는 심청 등을 영화처럼 클로즈업해 비춘다. 무대와 객석 사이 거리가 먼 대극장의 단점을 극복하고 관객을 몰입시키지만, 무대 위 배우의 모습과 목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자꾸 영상을 바라보게 된다.

창극 ‘심청’은 그리스 비극부터 셰익스피어와 경극까지 표현의 영토를 넓혀 온 우리 창극이 도달한 또 하나의 이정표라 할 만하다. 서울 공연은 내달 3~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만~8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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