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유전에 의한 콜레스테롤, 바이킹에서 얻은 단서

정승규 약사 2025. 8. 1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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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규 약사

1000년 전, 북유럽의 전사들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별자리와 새의 비행경로 따라 항해한 이들은 오늘날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해 그 땅을 ‘빈랜드(Vinland)’라 불렀다. 무모하면서도 대담한 이 여정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서양 횡단이었다.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최초의 인물이 바이킹 탐험가 르이프 에릭손이다. 콜럼버스보다 무려 500년이 앞섰다. 거친 파도를 뚫고 나아간 그의 여정은 오랫동안 전설 속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중반 정착한 유적이 발견되면서 인정받았다. 그와 함께 바이킹 후손들의 핏속에서 또 다른 유산이 드러났다.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이라는 심장을 위협하는 유전병이다.

간의 LDL(나쁜 콜레스테롤) 수용체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혈액 속 LDL이 제대로 제거되지 못해 혈관 벽에 쌓인다. 그 결과 동맥경화 협심증 심근경색이 젊은 나이에도 나타날 수 있다. 겉으론 건강해 보여도, 혈관 속에는 기름때가 서서히 끼는 셈이다. 나이가 들어 생기는 일반 고지혈증과 달리, 생활 습관 개선만으로는 조절되지 않아 위험하다.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은 세계적으로 약 250명 중 1명꼴로 나타나는 비교적 흔한 유전 질환이다. 우리나라 환자 수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처럼 바이킹 후손이 많은 지역에서 발병률이 유독 높다. 이 현상을 ‘창시자 효과(Founder Effect)’라고 한다. 초기 이주민 중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 유전자를 가진 소수가 고립된 지역에서 오랫동안 결혼과 출산을 반복하면서 유전자가 집단 전체에 퍼진 것이다.

이 질환은 가족 단위로 진단과 관리가 필요하다. 보통은 건강검진에서 LDL 콜레스테롤 수치가 190mg/dL 이상일 때 의심한다. 식이요법이나 운동으로 수치가 떨어지지 않고, 가족 중 젊은 나이에 심장병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유전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부모 중 한 명이 유전병이 있다면 자녀에게 50% 확률로 유전된다. 이 경우 형제자매 자녀 부모 등 직계 가족 전체에 대한 지질 검사 또는 유전자 검사가 권장된다.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은 조기에 발견하면 비교적 잘 관리할 수 있다. 현재 병·의원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콜레스테롤 저하제 스타틴 계열 약물(아토르바스타틴, 로수바스타틴 등)이나 에제티미브 복합제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단일클론항체로 만든 바이오 의약품 PCSK9 억제제(알리로쿠맙, 에볼로쿠맙)처럼 강력한 약도 등장해 치료 선택지가 넓어졌다. 적절한 약물 치료를 통해 LDL 수치를 정상 수준으로 낮추면, 심혈관계 질환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관건은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빨리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하느냐에 있다. 특히 부산처럼 심혈관질환 사망률이 높은 지역에서는 고콜레스테롤이 유전성인지 생활 습관성인지를 조기에 구별하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첫걸음이 된다.

상상해 보자. 부산의 한 집에서 혈관 추리소설이 시작된다. 운동 열심히 하고 채소도 잘 먹는 38세 가장의 LDL이 220mg/dL로 높게 나왔다. 아버지는 49세에 심근경색을 겪었고, 고모의 눈 가장자리엔 희미한 하얀 고리가 있었다. 발뒤꿈치 힘줄엔 콩알만 한 단단한 혹도 만져진다. 단서는 충분하다. 유전성이 강한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의 전형적 흔적이다. 가족이 함께 검사를 받자 형제 조카들도 비슷한 소견이 확인됐다. 즉시 고강도 스타틴과 에제티미브, 필요시 PCSK9 억제제를 더해 치료를 하자, 몇 달 만에 LDL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한 사람의 검사로 집안의 심혈관질환 위험을 대폭 낮췄다.


바다를 지배한 바이킹의 후손에게 전해진 유전자는 조용하고 치명적이다. 심장질환 가족력이 있다면, 고지혈증이 있다면, 특히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을 겪은 가족이 있다면 반드시 이 유전병을 의심해야 한다. 가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의 미래를 조금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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