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 비아저, 누리아! [이대한의 낭만연구실]


이대한 |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
과학자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짧은 대화로 뇌에서 도파민이 터져 나오면 생김새도, 출신도, 모어도, 자라온 문화도 완전히 다른 상대가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임을 직감한다. 파리에서 누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해! 나는 누리아야.”
지난 5월 ‘깃편모충과 친구들’이라는, 이름부터 흥미로운 국제학회가 유서 깊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열렸다. 그런데 학회장 입구에서 나를 맞이한 주최 쪽 ‘누리아’의 이름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1년 전, 과학채널 ‘안될과학’에서 동물의 기원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논문의 제1저자였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영상을 보여주자 누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구 반대편 수만명의 시청자에게 자신의 연구가 소개된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과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즐거움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각자 펼치고 있는 연구들에 대해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논문에 담지 못한 세세한 이야기까지 모두 나누고 나니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누리아와 나를 포함한 과학자들은 미지의 지적 영토를 누비고 다니는 탐험가들이다. 학회는 그런 탐험가들이 미지의 세계에서 잠깐 빠져나와 다른 탐험가들을 만나는 특별한 자리다. 그곳에서 각자 발굴해 온 퍼즐 조각들을 함께 맞추다 보면 혼자서는 미처 그리지 못했던 경이로운 생명의 풍경이 눈앞에 드러나곤 한다.
재즈를 좋아하는 내게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면 종종 이런 환시가 펼쳐진다. 깜깜한 배경 속 핀 조명이 쏘아진 무대, 과학자들이 트럼펫, 베이스, 드럼, 피아노 연주자로 변모한다. 이윽고 시작되는 즉흥 잼 세션. 오늘 처음 만난 연주자들이지만 금세 호흡을 맞춘다. 각자 연주에 점점 심취해 가다 기가 막히게 합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연주자들 사이에서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온다. 다른 과학자들과 짜릿한 지적 대화를 나누는 순간만큼은 무대 바깥에서 늘 부러움으로 바라보던 그 장면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만 같다.
파리에서 누리아와 나는 여러번 합을 맞춰보며 연구 이야기를 넘어 외국인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느꼈던 학계의 유리천장이나, 젊은 연구자로서 생존해 나가고 있는 마음들까지도 나누었다. 그리고 학회가 끝날 때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온 열정적이고 반짝거리는 이 과학자가 앞으로 나의 오랜 동료 탐험가이자 동지, 그리고 친구가 될 것임을.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꼭 한달 만에 나의 연구실이 위치한 지구 반대편 수원에서 재회했다. 누리아가 국제학회 참석을 위해 방한할 예정임을 알게 됐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학과 세미나에 초청했다. 누리아는 멋진 발표로 열렬한 반응을 끌어내며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역대 최장 세미나를 진행했다. 특별한 깃편모충을 찾기 위해 카리브해의 작은 섬 퀴라소까지 날아가 숙소에 간이 실험실을 설치하고 바위 해변을 누비며 진행한 연구는 말 그대로 탐험 그 자체였다.
세미나 이후에도 누리아의 활약은 이어졌다. 알고 보니 그는 ‘흑백요리사’, ‘폭싹 속았수다’와 같은 한국 콘텐츠를 즐길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받는 날이면 불닭볶음면을 끓여 먹을 정도로 케이(K)-문화에 진심인 친구였다. 함께 치맥을 한 후 ‘핵인싸’ 재질의 누리아는 우리 연구실 사람들을 노래방으로 이끌었다. 로제의 ‘아파트’ 등을 함께 열창한 누리아는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고 싶은 날이었어”라는 멋진 말을 남기고 숙소로 돌아갔다.
학회가 끝나고도 누리아는 3주를 더 머물렀다. 바르셀로나에서 온 남자친구까지 합류하여 서울과 부산, 경주와 제주까지 한국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나는 그 틈틈이 누리아와 두번을 더 만나 함께 수원 화성 성곽길을 거닐기도, 서로의 가족과 연인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탕수육과 짜장면을 나눠 먹기도 했다.
누리아가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날, 우리는 신기하게도 서로에게 똑같은 문자를 동시에 보냈다.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 그래, 어쩌면 인생에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적이나 참 의미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를 환대하며 쌓아 올리는 아름다운 기억과 우정 같은 것들이 아닐까. 고마워, 누리아.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줘서. 각자의 탐험을 이어가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봉 비아저(Bon viatge)!*
Bon viatge!* : ‘즐거운 여행 되기를!’이라는 뜻의 카탈루냐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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