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초콜릿 선물 꾸러미... 서방도 서독도 동독을 포기안했다”
“발 아래를 보세요. 장벽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난달 26일 통일과나눔 재단이 선발한 국내 중·고교 통일 교육 담당 교사 20여명으로 구성된 ‘독일 통일 연수단’이 찾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은 퀴어 축제 인파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광장 주변 건물에는 성 소수자 상징인 무지개 깃발이 나부꼈고 저마다 독특한 차림의 축제 참가자들 모습이 연수단 일행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연수단 일행은 “발 아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베를린자유대 이은정 교수의 설명에 걸음을 멈췄다. 광장의 일반 도로색과 확연히 구분되는 좁은 폭의 붉은 돌이 마치 ‘띠’처럼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다. “장벽길을 따라 걸어보자”는 이 교수의 제안에 연수단 일행은 퀴어 축제 인파 사이에서 한 줄로 줄지어 장벽길을 따라 걸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 보도에 콘크리트 장벽의 흔적이 그냥 ‘띠’처럼 남아 있는 모습은 독일 분단이 38선으로 허리가 완전히 잘린 한반도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서베를린은 동독에 둘러싸인 ‘섬’같은 곳이었다. 이 교수는 “서독은 서베를린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그렇기에 통일이 가능했다”고 했다.
옛 소련은 1948년 6월 서방의 서베를린 포기를 유도하기위해 철도·도로·수로를 막는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고 전기공급도 차단했으나 서독과 서방은 하루 수천번에 걸쳐 비행기를 띄워 생필품과 의약품, 연료 등을 서베를린 주민들에 공급했다. 결국 서방의 공수작전 성공에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철회했고 서베를린은 ‘자유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 실패 이후 1949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며 냉전이 본격화했다. 미국의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서독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1949년부터 1960년까지 동독의 고급 전문인력이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이탈한 인구는 약 250만에 달했다. 동독은 주민 이탈을 막기 위해 처음엔 철조망을, 이후엔 콘크리트 장벽을 올리고 나섰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990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록된 곳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베를린 경계선 바로 안쪽, 동독 구역에 위치했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뒤로 한 채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시오”라며 “유럽 전역에서 이 장벽이 무너질 것이다. 믿음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자유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서독 젊은이들이 손 망치로 장벽을 부수고 서로 끌어 안은 유명한 장면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에는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희생된 동독 주민들 추모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1961년 장벽 건설 이후 약 2년간 동·서 베를린은 협상을 했고 1963년 연말 크리스마스때 163만명의 서베를린 주민들이 동베를린 방문이 가능한 통행허가증을 발급받았다. 분단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 하늘에 별따기 처럼 어려워진 남북한 현실과 가장 대조적인 모습이다. 서베를린 주민은 동베를린의 가족·친지들과 만나러 갈 때 커피와 오렌지, 바나나, 레몬 등 동독에서 구하기 어려운 식료품과 기호품을 선물 꾸러미로 잔뜩 챙겨갔다. 당시 동독 정부도 서베를린 주민들의 동베를린 지역 방문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는데 서베를린 가족들과 만난 동베를린 주민들의 동독 정부를 향한 불만이 상당히 누그러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동·서베를린 주민 간 만남을 주도한 정치인이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었다. 동·서독 주민 간 적대감을 갖지 않도록하기 위해 만든 장치 중 하나가 ‘환영금’ 제도였다.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할 때 서독의 현금지원이 이뤄졌는데 연 2회에 걸쳐 가능했다. 이 제도는 1979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12월까지 운영됐다. 1988년 한해에만 약 270만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해 환영금을 받았다. 서독에서 환영금을 받은 동독 주민들은 동독으로 돌아가기 전 서독에서 바나나, 커피 등을 사갔고 결국 서독 마르크를 받아 서독에서 대부분 소비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처럼 길 바닥에 마치 ‘띠’처럼 남아 있는 곳도 있지만 베를린 시내 곳곳은 분단의 흔적인 장벽이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콘크리트 장벽 일부를 그대로 남겨놓은 곳이 여러 곳이다. 장벽이 처음 무너진 곳인 ‘본홀머 슈트라세’는 그 중 하나다. ‘본홀머 슈트라세’는 1989년 11월9일 오후 8시 서독의 ARD 방송이 “오늘은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동독이 오늘부터 국경을 모두 개방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장벽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고 한 보도를 본 동베를린 주민 50여명이 몰려든 곳이다. 이곳의 뵈제 다리에 국경검문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50명에 불과하던 인파는 서독 방송이 오후 10시30분 뉴스에서 같은 소식을 전하자 엄청난 규모로 불어났다. 검문소 직원과 경비대는 국경초소 출입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장벽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고 ‘본홀머 슈트라세’의 뵈제 다리에는 ‘본홀머슈트라세 다리에서 1989년 11월9일과 10일밤 1961년 8월13일 이후 처음으로 장벽이 개방됐다”는 내용이 동판에 새겨져있다. 이 동판에는 빌리브란트 전 수상이 “베를린은 살아날 것이고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했던 말도 같이 써 있다. 이은정 교수는 “그해 6월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는 유혈사태가 벌어졌지만 베를린에서는 ‘본홀머슈트라세’ 현장 검문소 책임자가 국경 문을 열고 굉장히 침착하게 대응해 인명 피해가 없었다”고 했다.
냉전 시절 동·서 베를린 사이 미군 검문소 중 하나인 ‘체크 포인트 찰리’는 당시 모습과 유사하게 복원되어 있다. 이곳은 외국인과 외교관, 분단 당시 베를린을 분할통치한 연합군 인원이 동·서 베를린을 오갈 때 통과하는 관문이었다. 동·서독 주민은 통과 대상이 아니었고 주로 외국 기자와 외교관, 군인들이 이동하는 통로였다. ‘체크 포인트 찰리’는 1989년 장벽 붕괴 전까지 미군이 관리한 지역이고 현재는 원래 위치에 재현된 미군 초소와 “당신은 지금 미국 영역을 떠나고 있다”는 냉전 시대를 재현한 표지판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연수단이 방문한 당일에도 미·소 냉전의 긴장감이 감돌던 미군 초소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는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베를린 남서쪽의 약 25km 거리에 위치한 포츠담도 장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포츠담은 1945년 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독일 분단을 확정한 ‘포츠담 회담’이 열린 곳으로 역사책에 등장하는 도시다.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열린 ‘체칠리엔호프 궁전’은 포츠담의 ‘반제’ 호숫가에 위치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번째 회담 장소로 거론된 장소는 베를린이었다. 하지만 심한 폭격으로 파괴된 곳이 많아 회담을 할만한 적합한 규모의 건물도 없었고 미·영·소의 회담 대표단이 머무를 숙소도 변변치 않아 결국 베를린 인근 소도시 포츠담이 미·소·영 3국 승전국과 패전국 독일의 회담장소로 낙점됐다.
체칠리엔호프 궁전은 포츠담과 베를린 경계에 인접한 ‘반제 호수’와 닿아있다. 체칠리엔호프 궁전 경내는 반제 호수를 끼고 드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 곳곳에는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다. 연수단 일행이 방문한 지난달 25일 이곳 주민들은 한가롭게 정원을 관리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잔디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숲이 울창하고 매우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공원인데 분단 시기에는 궁전과 호수 사이에도 장벽이 세워져 이곳 주민들이 호수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은정 교수는 연수단 일행과 숲길을 걸으며 “지금 걷는 길 바로 이곳에도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며 “이곳 주민들은 장벽에 가로막혀 장벽 너머 아름다운 호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장벽이 사라지고 통일이 되고 나서야 일상적 공원으로 산책이 가능해졌고 누구나 오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임종일 전북 전주동암고 한국사 교사는 “베를린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동베를린인지 서베를린인지 구분을 잘 못했는데 통일 이후 30년만 지나면 신경쓰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로 바뀐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며 “우리도 빨리 통일돼서 남한인지 북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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