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도 몰랐던 '하남 이성산성', 고대 아크로폴리스인가?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57> 하남 이성산성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이성산성(경기 하남시 춘궁동)은 해안가에 위치한 화성당성(경기 화성시 서신면)과 함께 신라 북진 전략의 거점 성(城)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최초로 신라의 신주(新州)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삼국시대(혹은 사국시대)는 어쩌면 한반도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소국들의 통합, 삼국 간 밀고 당기는 전쟁이 수백 년간 지속되면서 지역에 따라서는 주민의 국적이 순식간에 바뀌는 일도 흔했을 것이다.

오늘날 서울의 한강 유역 역시 그런 격동의 공간 중 하나였다. 삼국 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기점이 바로 이 산성을 둘러싼 쟁탈전 이후의 변화다. 후발 주자였던 신라가 553년 이 지역을 차지한 뒤로 다시 빼앗기지 않고 100여 년 동안 지켜낸 전략, 그리고 이 지역이 통일 이후 도시로 발전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질문이 이어진다. 이미 정복한 백제 왕도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은 왜 굳이 이 좁은 이성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 일대를 통치하려 했을까? 또, 왜 한산주가 오늘날 서울 지역의 한 귀퉁이(하남)에서 고려로 이어졌을까?

백제고도를 내려다보는 곳
이성산(209m)은 남한산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비록 높지 않은 지점이지만, 한강이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오늘날 서울 동쪽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지 않았다면 북으로는 송파 벌판과 한강이 아련히 보일 것이고, 남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남 일대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였을 것이다. 백제가 공주로 천도했지만 몽촌왕성과 풍납왕성뿐 아니라 수많은 왕과 귀족의 무덤인 적석총들이 늘어서 있는 부서진 백제고도를 내려다보는 신라군의 심정은 어땠을까?

올림픽공원 옆을 지나는 천호대로를 따라 남행하면 최근 백제 고분이 많이 발굴된 감북(하남시 감북동)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는다. 그곳에서 바로 왼편에 산성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다. 중부고속도로, 외곽순환도로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공중다리 서쪽 편, 그 정상에 바로 이성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백제? 신라? 누구의 성인가
누가 이 성을 쌓았을까? 백제 고도의 바로 후방에 위치한 이성산성은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라고 비정한 적이 있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백제성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발굴 과정에서는 백제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 성의 건축주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됐다. 발굴 결과 설명회에서 “왜 백제 유물이 없느냐”는 의문이 제기됐고, 심지어 ‘발굴단이 백제토기는 감춰두고 신라성을 주장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유물을 공개한다’는 황당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또 소설가 최인호의 ‘왕도의 비밀’에서는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우물정(井)’ 자 모양의 기호가 고구려의 표식이라 하여, 한동안 ‘고구려의 성’이라는 색다른 '썰'이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신라는 점령지에 중요한 성을 쌓을 때 경주에서 기술자들을 불러왔다. 신라가 건설한 화성 당성에서도 성역에 참여한 경주 기술 집단의 이름이 기와에 남아 있다. 이성산성의 축성법은 전형적인 신라식 공법이다. 성벽 하단부의 길쭉한 성돌 모양, 돌을 쌓을 때 들여쌓기, 또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축을 한 구조 등은 신라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당시 토성(土城)만 있었던 이성산성 일대에서는 어쩌면 석축성(石築城)을 쌓을 기술자를 구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백제가 거의 500년 동안 한성에 도읍했음을 감안하면 분명 이곳에 탄탄한 백제식 구조물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유적의 구조나 발굴 유물에서는 신라 문화적 요소가 압도적이다. 도읍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 성을 쌓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서울 강남 지역의 대모산이나 관악산 등에 남아 있는 돌로 쌓은 석축산성에서도 백제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쩌면 고구려를 의식한 백제는 왕도의 후방 지역에 굳이 방어선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 두 왕성의 사례에서 보듯 토축성을 쌓았던 백제의 흔적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축성하는 과정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인조의 명으로 직산에 있던 온조의 사당을 이곳과 연결된 남한산성에 지었다는 사실도 이성산성이 오랫동안 백제 왕조의 중요 거점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산주의 아크로폴리스
이성산성은 신라 한산주(漢山州·신라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 중 하나)의 첫 번째 치소(治所)였다. 한산주는 진흥왕 북한산비에서 나타나듯, 신라가 북방 경영을 위해 설치한 행정 단위로, 그 전신인 신주의 관청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이 이곳의 초대 군주(君主)였다. 통일 후 9주 5소경으로 지방관제가 정비되는데 당시 주(州)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청소재지에 비교될까?
그런데 이런 중요 관청을 사람들의 왕래가 불편한 산성에 설치했을까? 새로 차지한 영토를 지키려면 방어에 유리한 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통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행정단위인 ‘주’와 군사편제인 ‘정(停)’이 함께 있었던 것도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신주 이후 한산주의 치소는 오늘날의 이천, 북한산 등으로 몇 차례 옮겨갔지만 결국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이성산성과 그 아래 덕풍천 일대 평지가 다시 통일기 한산주의 치소로 자리 잡게 된다.

성 안에는 아주 특별한 건물로 보이는 팔각(八角), 구각 그리고 십이각 건물지들이 남아 있다. 그중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팔각·구각 건물지는 천단(天壇)과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된다. 분명 나라 제사를 모시던 공간이 틀림없다. 토기들 외에도 의례용 철제·토제 말이 다수 출토됐다. 이렇듯 이성산성은 고대 도시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행정·군사·종교 기능을 한, 말 그대로 한산주의 ‘아크로폴리스(산 위의 높은 도시)’였다.

저수지, 고고학자들의 보물창고
이성산성은 골짜기를 끼고 주변 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包谷)식 산성으로, 길이가 1,665m에 달하는 한수 지역에서 대단히 큰 성이다. 거주 인구가 많았던 만큼 두 곳에 큰 저수지가 있었고, 발굴 과정에서 흥미로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고고학자들을 들뜨게 했다.

먼저, 남문지 인근 장방형 저수지의 펄층에서는 신라 관직명인 ‘도사(道使)’와 ‘남한성’이라는 지명이 새겨진 목간이 발견됐다. 이는 곧 이곳이 한산주의 치소였음을 보여준다. 또 목간에 적힌 ‘무진(戊辰)년’은 603년으로 추정되는데, 성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축조 됐음을 말해준다.

또 놀랍게도 고구려 벽화고분에 그려진 요고(腰鼓·허리에 차고 치는 작은 장고)가 발견됐다. 어린이 장난감으로 추정되는 목제 인물상과 얼굴상도 흥미롭다. 문방구인 토제 벼루가 여러 점 수습됐고, 건축 도구인 당척(唐尺)과 고구려척(尺)도 확인됐다.


식생활을 짐작게 하는 동물 뼈도 다수 나왔다. 특히 개의 다리뼈는 안쓰럽게도 도살되기 오래전 부러졌던 흔적이 확인돼, 이 개가 절뚝거리며 성안을 걸었을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목간이야 통치와 관련된 중요한 공문서지만, 요고와 다리 부러진 개는 당시 성내 사람들의 여흥과 일상을 마치 영화 장면처럼 생생하게 비추는 장면이다. 물론 그 개는 그해 여름을 넘기진 못했을 것이다.

수수께끼 속 고대도시, 하남
하남 하사창리 사지는 한때 우리나라 최대 철불이 있었던 자리다. 일제 강점기, 두 구의 거대한 철불이 사지에 남아 있다고 보고됐지만, 그중 하나만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높이 2.8m의 좌불인데, 당시 용산으로 옮기기 위해 박물관 벽을 허물어야 했을 정도로 거대했다. 10세기에 조성된 철불은 통일기 이 지역 세력가였던 왕규(王規)의 후원으로 제작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남에는 ‘궁(宮)’ 자가 들어간 지명의 골짜기마다 큼직한 주춧돌과 석탑이 남아 있는 사지들이 있다. 또 산성 아래 골짜기에는 고대 도시 유적이 여전히 땅속에 잠자고 있다. 비록 면적이 좁기는 하지만, 도시가 대단히 오랫동안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남북을 잇는 한강 수로 교통의 요지였던 하남은 원래의 주치소라는 행정중심지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하남의 예사롭지 않은 유적들을 마주하면 고대 도시 발달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통일 이후 평화시기에도 왜 이곳에 주치(州治)를 유지했을까. 바로 인접한 한강변에 백제고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왜 요즘처럼 ‘강남 개발’을 하지 않았을까? 태조 왕건의 장인으로 승승장구했지만, 결국 반역으로 처단된 왕규와 같은 거대 세력가를 낳은 도시의 저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오래전, 성 아래 춘궁리 주거지 발굴 현장에서 흙 속에 묻혀 있던 보석처럼 푸른 색조를 내뿜던 고급 청자편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겹친다. 그 오묘한 빛깔처럼, 하남의 역사는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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