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은 북적, 면세점은 텅텅…8200원 입찰의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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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인천국제공항이 역대 최대 이용객 수를 기록하며 코로나19 이전을 넘어선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면세점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올해 상반기 인천공항 이용객은 3200만 명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정작 면세점 매출은 2019년 대비 72% 수준에 머물러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2023년 4월,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이 제시한 '살인적' 입찰가에서 비롯됐다. 당시 두 업체는 여객 1인당 8170원, 8200원이라는 전례 없는 공격적 임차료를 써내며 10년 운영권을 거머쥐었다. 인천공항공사가 제시한 최저가의 무려 160%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유통업계 관계자 A 씨는 "당시만 해도 유통업계가 코로나가 끝나면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화장품·향수·주류·담배 분야의 객단가는 2019년 5만 1000원에서 작년 2만 9000원으로 무려 43% 급락했다. 과거 면세점의 '큰손'이던 중국인들의 소비 패턴이 완전히 바뀐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이들은 더 이상 샤넬이나 디올 같은 명품을 찾지 않는다. 대신 올리브영에서 K-뷰티 제품을 구매하거나, 아예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는 추세다.
면세점 대신 올리브영, 완전히 바뀐 소비 지형
일본 쇼핑 선호하는 한국인들
면세점가가 위기에 몰린 사이,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뷰티 유통업계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과거 면세점에서 샤넬, 디올 등 명품 화장품을 대량 구매하던 중국 관광객들이 이제는 올리브영과 다이소로 발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소비 패턴은 고가 명품에서 가성비 중심의 K-뷰티 제품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실제로 올리브영은 3월 글로벌몰 올영세일에서 주문액이 전년 대비 107% 급증하며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기존 마스크팩과 선크림 위주였던 해외 판매가 유산균, 헤어 트리트먼트, 치약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확산되면서 K-뷰티를 넘어 K-헬스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다이소 역시 LG생활건강의 '바이 오디티디'가 100만 개 이상 판매되고, 애경산업의 전용 브랜드 '투에딧'이 7개월 만에 130만 개 판매를 기록하는 등 가성비 뷰티템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면세점에서 5만 원대 화장품을 사던 고객들이 이제는 1000원대 다이소 제품으로 눈을 돌린 셈이다.
한국인 여행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급격한 엔화 약세로 일본 현지에서 직접 구매하는 것이 훨씬 저렴해지면서, 인천공항 면세점을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면세점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주류도 애호가들은 더 이상 공항에서 사지 않는다. 한 위스키 마니아는 "일본이나 대만 등을 갈 때는 면세점에서 사는 것보다 현지에서 사는 게 더 싸다. 고환율 때문에 면세점 가격이 좋지 않고, 주류 반입 규정도 완화돼서 더 이상 굳이 면세점에서 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은 매월 50억~80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하며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 면세점 업계는 현재의 매출 부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구조적 변화라고 진단하고 있다.
절망적 현실을 받아들인 두 업체는 인천지방법원에 임대료 40% 인하 조정을 신청했다.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위약금을 감수하고라도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극단적 결단을 내린 상태다. 면세점을 보유한 유통그룹 B 관계자는 "매달 수십 억씩 쏟아 붓느니 위약금을 내고 정리하는 게 나을 수 있는 상황"이라며 "철수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라고 토로했다.
월 80억 적자의 늪, 돌이킬 수 없는 구조적 변화
2000억 위약금 감수하고도 철수 검토
더욱 심각한 건 이런 추세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는 점이다. 고환율 상황이 장기화되고 소비자들의 새로운 구매 패턴이 고착화되면서, 면세점 매출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한 업계 전문가들은 "현재의 소비 패턴 변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구조적 전환"이라며 "면세점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인천공항공사도 극도로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면세점 수익이 전체 매출의 27%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주요 임차업체들이 줄줄이 철수할 경우, 공항 운영 자체에 치명적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함부로 임대료를 깎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사는 '임대료 인하 시 배임 또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소지가 있고, 다른 업체와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는 법률 자문에 따라 조정 요청 불수용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해외 주요 공항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코로나19 이후 면세점 임대료를 30%까지 인하해주며 적극적인 상생 정책을 펼쳤고, 중국 상하이공항도 기존 임대료 최소보장액을 4분의 1 수준으로 대폭 낮췄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경직된 원칙론만 고수하고 있어 글로벌 트렌드와 동떨어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서 말했듯 두 업체 모두 '극단적 선택'을 고려하고 있다. 10년 계약 중 이제 2년이 지나 8년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위약금 2000억 원을 감수하고도 철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B 관계자는 "현재 추세라면 위약금을 내고 나가는 것이 오히려 손실을 줄이는 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신라·신세계 철수하면 중국 CDFG 진출
중국 자본의 기회, 국민 정서와의 충돌
이런 갈등이 장기화되면 면세업계 지형도 자체가 뒤바뀔 수 있다. 신라·신세계가 결국 철수를 결행할 경우, 그 빈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중국 국영기업 CDFG(중국중면집단)다. 아시아 최대 면세점 운영업체인 CDFG는 한국 시장 진출 의지를 꾸준히 드러내왔다.
실제로 CDFG는 2023년 인천공항 면세입찰 당시 사업설명회에 직접 참석했고, 1~4구역 전 영역에 입찰서를 제출했다. 비록 신라·신세계의 무리한 고가 입찰에 밀려 탈락했지만, 이들의 한국 진출 야망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딜레마가 등장한다. 국가 관문인 인천공항을 중국 국영기업이 장악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앞서 유통업계 관계자 A 씨는 "경제적으로는 CDFG가 현실적 대안일 수 있지만, 중국 자본이 우리 공항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정치적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런 배경에서 인천공항공사가 최소한 신라·신세계와는 진정성 있는 협상 테이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원칙론만 고수하다가 더 큰 국가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 것이다.
여객 1인당 8200원이라는 하나의 숫자가 촉발한 나비효과는 이제 면세업계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지진이 됐다. 과연 이 전대미문의 위기가 극적인 타협으로 봉합될지, 아니면 업계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대격변의 서막이 될지 그 결말이 주목된다.
김태현 기자 toyo@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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