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과 저속 사이, 내 삶의 속도는? [.txt]

한겨레 2025. 8. 1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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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0, 184, 177);">안인모의 미락(美樂)클</span>
‘빨리빨리’ 세태 속 급부상하는 저속 노화
느림보 드뷔시와 꼭 닮은 ‘렌토보다 느리게’
느린 음악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왈츠를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 위키미디어 코먼스
같이 들을 클래식
클로드 드뷔시, 렌토보다 느리게(1910)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눈부신 노을이 뿌려진 광장, 나는 출 줄 아는 춤이 없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케이팝(K-Pop) 댄스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안고 아주 느리게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기억이 가끔 차량으로 꽉 찬 도로를 지나며 문득문득 떠오른다. 체코의 대학도시 브르노. 골목골목을 느리게 걸으며 여유를 느끼기에 참 좋은 도시였다.

브르노는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태어난 도시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쿤데라의 부고가 떠서 기분이 묘했다. 쿤데라의 소설 ‘느림’은 그가 이미 프랑스로 망명한 상태에서 집필한 소설로, 원제목 ‘La lenteur’(라 랑퇴르)도 프랑스어다. ‘Lent’(렌트)는 이탈리아어로도 ‘느리게’를 의미한다. 소설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렌토’(느리게)라는 음악 용어가 떠올랐다. 렌토는 아다지오와 라르고 사이 정도의 느린 템포로, 너무 웅장하거나 무겁지는 않은 느낌을 동반한다.

‘느리게’는 우리 한국인의 ‘빨리빨리’와 너무나 상반되는, 거의 쓸 일이 없는 단어가 아닐까? 그런데 근래 이 ‘느리게’를 애타게 갈구하는 분야가 급부상하고 있다. 휴대폰을 열면 어디서든 광고를 보게 된다. 내게 맞춰진 광고였을까? 피부를 위한 마스크팩에 탄수화물과 당분을 줄인 샐러드팩, 그리고 이제 식스팩도 만들어야 한단다. 광고를 보다 보면, 휴대폰은 휴대용 장바구니가 되기도 한다. 그토록 젊고 파릇한 제트(Z)세대도 노화가 두려워 음주를 줄인다고 한다. ‘저속 노화’, ‘느리게’ 나이 들기. 고속 성장 사회에서 저속 노화라니. 아무리 바빠도 노화만큼은 늦춰야 하니, 만만치가 않다. 결국 지갑을 여는 건, 속도 조절을 위해서다.

느림이 문제가 되지 않고, 느려서 좋은 것, 노화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일상에선 시간과 싸우고, 시간에 쫓기지만, 그토록 느린 느림을 누리는 건, 예술에서라면 가능하다. 미술 전시회에선, 그 공간 안에서만이라도 조금은 느릿하게 걸어볼 수 있다. 또 발레 공연이나 클래식 음악회에서는 음악의 속도 변화, 즉 빠르다가도 느리고, 느리다가도 빠른 그것에 나를 맡기기만 하면 된다. 나는 늘 음악에서는 템포, 즉 빠르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내가 직접 연주할 곡이라면 더욱 그렇다. 작곡가가 지시한 템포에 갇혀, 그것을 엄수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니 말이다. 음악의 빠르기도 도로 위 속도 표시처럼, 80㎞/h 등으로 표시될 수 있다.

음악 연주의 빠르기를 수치화해 보여주는 기계식 메트로놈. 게티이미지뱅크

예를 들어 (♩=84)는 84 BPM(Beat per Minute), 즉 ‘1분 동안 4분음표가 84번 연주되는 빠르기’를 의미한다. 이처럼 음악 연주의 빠르기의 수치화가 가능한 건 메트로놈이라는 신박한 기계 덕분이었다. 메트로놈은 디지털로 바뀌어, 매우 가벼운 뽁뽁 소리를 내더니, 요즘엔 휴대폰 앱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우리가 음악에서 느끼는 ‘빠르기’의 정도는 빠르기를 가리키는 숫자뿐 아니라, 느낌과 기분이 맞물린 결과다. 같은 빠르기라 해도, 소리의 질감과 뉘앙스에 따라 다르게 느끼게 된다.

프랑스 문학에서 느껴지는 느림과 여유가 좋아, 그것들을 탐독했었다.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와 그의 친구 에리크 사티는 느린 걸로 악명이 높았다. 그 유명한 ‘짐노페디’를 작곡한 사티는 느리게 걷기의 천재였다. 너무 걸음이 느려서, 사람들은 그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편 드뷔시는 담배 한 개비를 태워야(물론 실내에서) 음표 한개를 그려 넣었다. 나라면 한 소리 했을 듯하다! 그의 작곡 속도야말로 렌토(느리게)보다도 훨씬 느렸던 것!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출판업자는 드뷔시의 저속 작곡을 인내하느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드뷔시는 마흔여덟살에 그런 자신과 꼭 닮은 피아노곡, ‘렌토보다 느리게’라는 3박자의 왈츠를 작곡했다. 이 곡은 당시 파리의 카페와 댄스홀에서 유행하던 슬로 왈츠를 표방한다.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면 딱 좋을 듯한 선율이다. 현악기가 느리게 활을 그어줘도 제격으로, 드뷔시도 이를 알고 그 즉시 바이올린 편곡 버전을 만들었다. ‘렌토보다 느리게’는 빠르기말처럼 보이지만, 곡의 제목이다. 악보에는 ‘렌토(느리게)―부드러우면서 유연하게 연주하라’고 써뒀다.

똑같은 시간도 아날로그 감성으로 유연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게티이미지뱅크

읊조리듯 펼쳐지는 다소 굼뜬 선율은 나른하면서도 게으른 느낌으로 가득하다. 마치 지난날을 회상하듯, 그렇게 급할 것 없이 유유자적하다가 열정적인 왈츠로 돌변해 클라이맥스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 부분을 연주할 때는 실제로 왈츠를 추는 느낌마저 든다. 악보 곳곳에 ‘느려지며’, ‘사라지듯이’, ‘유연하게’ 등의 지시가 많아, 시간을 밀고 당기듯 써야 한다. 어디까지 느려져야 할지, 또 얼마나 유연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때 작곡가가 직접 연주해 알려준다면!

마침 모범 답안 같은 드뷔시의 연주가 남아 있다. 그는 이 곡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연주한다. 궁금하면 어서 들어보시기를. 비교 삼아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1951년 연주와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의 1946년 연주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바이올린에서 풍기는 오래되고 낡은 아날로그 감성은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여유를 선사하며 시계의 초침과 분침을 잊게 해준다. 그래서일까? 깨끗한 고음질의 근래의 녹음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렇게 느린 음악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왈츠를 추고 싶어질지도.

고속도로의 속도제한 표지는 우리가 과하게 가지 않도록 안내한다. 또 최저속도 제한 표지도 안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굳이 느릴 필요도 빠를 필요도 없다. 고속으로 성장하며 저속으로 노화되려면, 내 삶의 속도(BPM)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안인모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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