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절망 편, 조심스러운 출발선 [콘텐츠의 순간들]

김윤하 2025. 8. 1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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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꾸준히 성장한 케이팝 비주얼은 때로 음악보다 강렬한 인상을 전했다. 일종의 케이팝 희망 편이다. 새로운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4월30일 신인 걸 그룹 키키가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서울 원더쇼’에서 공연하고 있다. ⓒAP Photo

올 상반기 화제를 모은 케이팝 그룹 가운데 키키(KiiiKiii)가 있다. 스타쉽 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 그룹으로 이들이 주목받은 건 다름 아닌 ‘비주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비주얼’은 케이팝에서 흔히 말하는, 뛰어난 외모를 가진 멤버를 지칭하는 특수 용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의 비주얼(Visual), 키키라는 그룹과 데뷔작을 둘러싸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케이팝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유명 포토그래퍼나 푸드 디자이너의 협업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홈페이지 운영이 감각의 정점을 찍었다. 이제는 SNS에 왕좌를 물려주고 지난 세기의 유물이 되어버린 ‘홈페이지’가 콜라주로 장식된 팝업창에서 해외 유기농 브랜드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을 큰 틀로 그 안에 그룹 키키의 멤버별 공식 포토나 포인트 컬러까지 꼼꼼하고 요령 있게 담아내며 입소문을 탔다. 해당 프로모션의 성공 때문인지 키키는 8월 발표하는 디지털 싱글 〈댄싱 얼론(Dancing Alone)〉의 홈페이지도 공들여 준비했다. 이번에는 ‘개러지 세일’을 테마로 그래픽 티셔츠, DVD, 캠코더, 게임 콘솔 등 일명 ‘밀레니엄 감성’을 자극하는 아이템과 나만의 포스터 커스텀 기능까지 한층 업그레이드된 ‘젠지력’으로 다시 한번 케이팝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어떤 음악, 그 어떤 멤버보다 강력한 파장이었다.

바야흐로 ‘비주얼 시대’다.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영상이 익숙한 세대, 케이팝은 그 최전선에서 날카롭게 시대를 이끌어온 대중문화 가운데 하나다. 여전히 ‘음악은 거들 뿐’이라는 유구한 오해의 잔재가 남아 있을 정도로, 케이팝과 비주얼은 태초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룹을 구성하는 멤버들의 외모, 무대의상,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앨범 콘셉트 사진 등 음악을 제외한 케이팝의 거의 모든 요소에는 ‘눈으로 본다’라는 전제가 기본에 깔려 있었다.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한 케이팝의 매력이 대중 사이를 파고드는 속도만큼 비주얼의 진화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케이팝 비주얼을 이루는 전반이 고루 발전했다. 무대를 위해 특별히 만든 제작 의상은 누가 봐도 ‘아이돌’ 같은 전형성에서 탈피해 스트릿이나 명품 브랜드와의 다채로운 협업을 통해 무대 밖까지 점차 영향력을 뻗어 나갔다. 퍼포먼스는 세계화된 케이팝의 주요 매력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소환되는 제1의 요소가 되었다. 콘셉트 포토나 뮤직비디오는 사진이나 영상을 케이팝답게 잘 찍는 것을 넘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각국의 재능 있는 젊은 창작자들을 교류하게 만드는 가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키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꾸준히 성장한 케이팝 비주얼은 때로 음악보다 강렬한 인상을 전했다. 비단 특정 그룹만의 현상이 아니다. 최근 컴백하거나 컴백에 앞서 콘셉트 비주얼을 공개해 좋은 반응을 얻은 그룹들의 면면을 보자.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보이 그룹 클로즈 유어 아이즈(Close Your Eyes)의 경우 ‘눈 내리는 여름’을 주제로 한 타이틀곡 ‘스노이 서머(Snowy Summer)’로 ‘한여름의 호러’라는 익숙한 조합을 신인다운 유쾌함으로 풀어내며 호감도를 높였다. ‘레트로 스페이스’(〈BAD LOVE〉), ‘사이보그’(〈Pleasure Shop〉) 등 각 앨범 콘셉트와 자신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조합한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콘셉트 장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샤이니 멤버 키의 솔로 작업도 눈여겨볼 만하다. 역시 8월 발매를 앞둔 앨범 정규 3집 〈헌터(HUNTER)〉는 초현실과 괴담을 조합한 색다른 콘셉트로 앨범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해당 앨범마다 콘셉트를 영상로 풀어낸 일명 ‘무드 필름(Mood Film)’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3집 앨범 <헌터> 발매를 앞둔 샤이니 멤버 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막상 뚜껑 열자 실망감

여기까지는 일종의 케이팝 희망 편이다. 인류 역사상 비주얼이 가장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시대, 케이팝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화 콘텐츠보다 앞장서 누울 자리를 봐둔 장르가 되었다. 새로운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어디까지나 같은 속도로 나란히 성장할 줄 알았던 케이팝 음악과 비주얼이, 어떤 지점에서 벌어진 격차를 줄이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속도로 계속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 현재 대다수 케이팝 음악은 비주얼의 성장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음악이 무조건 비주얼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게 아니다. 지난해 케이팝을 대표한 에스파의 활약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쇠 맛’이라는 다소 낯선 키워드를 음악에서 뮤직비디오까지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통해 똑똑하게 풀어내며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파와 쇠 맛이라는 단어를 듣고 ‘아마겟돈(Armageddon)’의 금속성 사운드와 힐이 무기로 변하는 ‘위플래쉬(Whiplash)’의 소품을 동시에 떠올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둘 중 하나만 떠오른다면 그것을 두고 각각 성공적인 노래나 비주얼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노래를 둘러싼 구성 요소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 케이팝 히트 사례라고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는 케이팝 절망 편의 조심스러운 출발선이다. 잘 만든 비주얼이 대중의 마음을 훔치기 좋은 시대다. 눈이 즐겁고, 새로 만나게 될 노래에 대한 기대감도 적당히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기다린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결국 잘 만든 비주얼이란 잘 만든 노래, 곡 소화력 높은 멤버들과의 시너지로 곡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충실한 파트너다. 최근 케이팝을 내걸고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의 수록곡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케이팝 전형성’을 바탕에 두고 만든 고수들의 조별 과제는 그 어떤 복잡한 수식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고 있다. 누구보다 쉽고 가벼운 그들의 발걸음에 케이팝의 본질을 새삼 되돌아본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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