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도 가르는, 잔인하게 더운 계절…여름은 이제 ‘계급’이다

“태양 때문이었다.”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한낮의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면서, 그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햇빛과 땀, 머리를 짓누르는 열기의 존재만 기억해 내었다. 굳이 따지자면 태양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
‘이방인’은 태양이 방아쇠 당겼다지만
너나 할 것 없이 태양을 원망하게 되는 계절이다. 덥다. 그냥 더운 것이 아니라 잔인하게 덥다.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태양인데, 해마다 더 덥다. 땅은 갈라지고 그 사이로 땀은 쏟아진다. 그럴수록 대낮에 날카로운 총성이 터진 것처럼 인간의 삶도 갈라진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친구는 얼마 전에 나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쏟아낸다. “예전엔 에어컨 없는 집이 자랑이었어. 그게 파리지앵답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젠 창문도 못 열고, 밤새 잠도 못 자. 매일 아침이 두려워.” 그의 시답지 않은 넋두리만은 아니다. 한때는 ‘친환경’의 상징이던 에어컨 없는 생활이 이제는 생존의 위협이 되었다. 40도를 넘는 폭염이 수 주째 이어지는 남유럽의 해안 도시들도 더 이상 낭만적인 휴가지가 아니다. 거리엔 더위를 피해 그늘을 전전하는 노숙인들이 늘었고, 냉방 없이 숨을 거두는 노인들의 소식도 반복된다. 리조트의 화려한 이면에도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폭염 사망자 통계가 매일 갱신된다. 하지만 냉방이 완비된 냉기마저 느껴지는 주택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과 보호장비도 없이 아스팔트 위에서 일하는 이민자 노동자들이 겪는 더위는 전혀 다르다. 더위를 바라보는 사람과 더위를 견뎌 내야 하는 사람의 차이다.

더위는 사회·구조적 불평등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선 날씨 앱조차 체감 온도를 표시하지 않는다. 수단 하르툼은 섭씨 51도를 넘겼다. 케냐 농촌의 타는 대지 위에서 살아남기조차 힘들다. 선풍기를 돌릴 전기가 없고 시원하게 목을 적셔줄 수돗물도 없다. 더위의 가혹함은 가속도로 늘어나고, 더위를 막거나 피할 방도는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이제 여름은 계급이다. 누구는 휴가를 떠나고 누구는 그곳에서 일한다. 누구는 냉방된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누구는 태양 아래서 벽돌을 나른다. 더위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사회구조 속에서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고통이다. 대응 능력은 계급에 따라 나뉜다. 에너지 접근성, 주거 여건, 노동환경 등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불평등한 것들이 엉켜서, 누구에게는 더위가 불쾌지수가 되고 누군가에겐 생사의 문제가 된다.
이런 불평등의 합작품은 일터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가장 더운 시간, 가장 더운 공간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이 일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최근 보고서에서 폭염을 “노동자 건강에 가장 빠르게 확산되는 위협”으로 지목했다. 매년 2억 명 이상이 열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과 생산성을 잃고 있는데, 그 피해는 농업·건설·운송 부문의 저소득·비공식·이주노동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폭염은 점점 더 ‘가장 약한 노동자’에게 구조적으로 떠넘겨지고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일터에 오면 인간은 방아쇠를 당기고, ‘위험의 외주화’라는 부조리극이 시작된다.
한국에선 더 큰 불평등의 ‘온도 차’
유난히 더운 한국에서는 죽음의 총성이 더 크다. 경북 구미의 한 건설현장에서는 23살의 외국인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출근 첫날이었다. 당시 기온은 37도를 넘겼고, 그의 체온은 40도에 달했다. 지하 구조물 안에서 철근을 나르던 중 쓰러졌다. 냉방 장치도, 그늘도, 응급조치도 없었다. 그는 첫 출근날 퇴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시간, 서울 강남의 한 고층 빌딩, 냉방이 완비된 어느 회의실에서 'ESG 경영'을 논하는 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빌딩 사이로, 매일 갱신하는 열대야를 걱정하는 방송이 쏟아지는 밤에도, 로켓배송을 위해 제 몸을 로켓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두 공간의 온도 차는 단지 기온의 문제가 아니다. 조지 오웰이 <버마 시절>에서 썼듯이 “더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모멸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힘”이다.

죽음의 방아쇠 당긴 건 인간·제도·정책
폭염이 일시적 재난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대응은 느리고 제한적이다. 일부 기업은 휴식을 권고하고, 기상청은 경보를 발령하지만, 이주·하청·단기계약 노동자는 여전히 가장 뜨거운 시간,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일한다. 대응 매뉴얼은 있어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 결과, 기후 적응이란 말은 점점 기후 회피나 외주화로 변질하고 있다. ‘적응’은 특권이 되었고, 위험은 구조적으로 전가된다.
그러니, 죽음의 방아쇠를 당긴 건 태양이 아니다. 인간이고, 제도이며, 정책이다. 태양 아래 있다고 모두 같은 여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여름이 계급인 세상에서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곧 여름이 간다고 방심하지 말라. 겨울도 곧 온다. 거기엔 또 다른 냉기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가를 것이다.
이상헌의 바깥길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고용정책국장으로 일하는 필자가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을 통해 바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풀어갑니다. 국제 뉴스보다는, 그 뉴스들 사이에서 그가 떠돌며 보고 느낀 더 많은 이야기를 아래 링크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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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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