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237> 여자 골프 메이저 日 2승, 韓 0승] 10년 전과 확 바뀐 위상… 도전 정신에서 갈렸다

10년 전 한국과 일본 여자 골프의 실력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데뷔 3년 차인 한국의 전인지(당시 21세)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월드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파스컵(5월)과 일본 여자 오픈(10월)을 우승했다. 처음 참가한 두 차례 일본 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것이다. 일본의 내셔널 타이틀 대회인 일본 여자 오픈은 당시 연장에 들어간 전인지와 이미향, 기쿠치 에리카 등 세 명만이 언더파 스코어로 대회를 마칠 정도로 코스 세팅이 까다로웠다. 그래도 전인지는 4차 연장 끝에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해 세계 최고 권위의 여자 골프 대회인 US 여자 오픈과 KLPGA투어 하이트진로 챔피언십까지 우승한 전인지는 한 시즌 한·미· 일 3국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하며 ‘메이저 퀸’ 이란 자랑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한국 1등이 세계 1등’이던 시절이었다.
미국 LPGA투어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의투어를 운영하던 일본 여자 골프로선 뼈아픈 순간이었다. 당시 국내 골프 전문가 사이에선 이런 말이 돌았다. “미국에서 우승하려면 4라운드가 열리는 나흘 가운데 사흘을 잘 쳐야 하고, 한국에서 우승하려면 3라운드가 열리는 사흘 중 이틀을 잘 쳐야 한다. 일본에선 사흘 가운데 하루만 잘 치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본 것이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여자 골프 투어 대회 상당수가 3라운드였다.
‘도전 의식, 투지’ 잃어버린 韓 여자 골프
8월 3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웨일스 남부 로열 포스콜 골프클럽(파72)에서 끝난 미 LPGA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AIG 여자 오픈은 일본 선수가 리더보드 상단을 차지하는 결과로 막을 내렸다. 키 150㎝로 LPGA투어 최단신인 야마시타 미유(일본)가 최종 합계 11언더파 277타로 우승했다. 가쓰미나미(27)가 공동 2위, 다케다 리오(22)가 공동 4위에 이름을 올려 일본 선수 3명이 ‘톱 5’에 이름을 올렸다. 야마시타와 챔피언 조에서 경기한 김아림(30)이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톱10 성적인 공동 4위로 대회를 마쳤다.
일본은 지난 2년간 서로 다른 네 명의 선수가 네 개의 메이저 대회를 우승했다. 2024년US 여자 오픈(사소 유카)과 에비앙 챔피언십(후루에 아야카), 올해 셰브론 챔피언십(사이고 마오)과 AIG 여자 오픈(야마시타 미유)을 거머쥐었다. 한국은 지난해 베테랑 양희영(36)이 KPGA 위민스 PGA챔피언십에서 거둔 1승이 전부다.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한 일본 여자 골프와 최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는 한국 여자 골프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 여자 골프는 국내 투어가 발전하면서 오히려 경쟁력의 원천이던 도전 의식과 투지를 잃기 시작했다.
협회는 외국 대회 출전을 제한하는 폐쇄적인 정책을 폈다. 국내 투어 활동만으로도 상당한 돈을 거머쥐게 된 선수는 위험 부담이 큰 세계 무대 도전보다는 안주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올해부터 외국 대회 출전 제한이 완화됐어도 선수가 나서지 않는다. 반면 한국과 미국, 유럽 선수에게 밀려 변방에 머물렀던 일본은 국제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절치부심했다.

체격이 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일본 여자 골프 선수 키는 세계 무대에서 작은 편이다. 지난 2년간 메이저에서 우승한 네 명 가운데 후루에(153㎝), 사이고(158㎝)까지 세 명이 160㎝를 넘지 못한다. 이들은 비거리에서 밀리는 단점을 탁월한 쇼트게임 능력과 퍼팅으로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야마시타는 이번 대회 기간 뉴질랜드 출신 캐디와 일본어에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의사소통하는 모습이 자주 잡혔다. 하지만 세계 정상에 서겠다는 꿈과 희망의 크기, 좌절과 괴로움을 견디는 능력에선 이들이 이미 한국 선수를 앞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야마시타는 “인생 전부를 걸었던 꿈이자 목표를 이뤘다”고 했다. 그 방법으로는 “매일 노력하고, 변화하고, 발전하려고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스윙 코치인 야마시타의 모습에선 ‘골프 대디’와 함께 세계 정상에 올랐던 한국 여자 골프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야마시타는 생일이었던 3라운드에 성적이 부진하자 밤늦게까지 아버지와 심야 가족회의를 했다. 잠시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도 회의는 계속됐다. 예전 스윙 영상을 비교해 보고 ‘머리의 축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고(아버지 설명), 조정을 거친 뒤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설 때는 완전히 준비가 된 상태였다고 한다.
2010년 기점으로 크게 바뀐 日 여자 골프
일본 여자 골프는 2010년을 기점으로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일본 여자 골프의 박세리’라 할 수 있는 미야자토 아이(40)가 일본 선수로는 사상 처음 여자 골프 세계 1위에 오르며 ‘일본 선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미야자토를 동경하며 프로 골퍼의 꿈을 키운 이른바 ‘아이짱(미야자토의 애칭) 키즈’가 현재 일본 선수의 주축이다.
고바야시 히로미(60) JLPGA 회장은 2010년 취임하면서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선수를 키우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다. 고바야시 회장은 1985년 JLPGA투어에 데뷔해 11승을 거두었고, 미 LPGA투어에 1990년 데뷔해 신인상을 받고 2003년까지 뛰면서 4승을 거둔 일본의 스타 선수 출신이다. 유럽 투어에서도 1997년 에비앙 마스터스를 우승했다.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수가 나오려면 일본의 시스템을 국제 무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JLPGA투어에서 비중이 높았던 3라운드 대회를 상당수 4라운드 대회로 바꾸도록 했다. 해외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4일 경기의 생활 리듬부터 갖춰야 한다고 본 것이다. 레전드 선수를 통해 대회 코스 세팅을 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핀 위치를 그린의 사각지대(페어웨이에서 보면 그린 형태가 경사로 인해 거리 계산이 어려운 곳)에 꼽는 식으로 상상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2부 투어의 2일짜리 경기를 3일로 늘리는 등 2부 투어 강화에도 힘을 쏟았다. 2부 투어에서 대만 스폰서와 함께하는 공동 주관 대회를 늘려 어린 선수가 외국에서 대회 경험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선수 실력이 늘고 국제 대회 성적이 좋아지면서 일본 1부 투어 대회 수는 연간 35~39개에 이를 정도로 더 발전했다. 일본은 또 LPGA투어 메이저 대회 상금을 연간 상금 랭킹에 반영한다. 투어 전반에 활력이 더해지자 뛰어난 인재가 일본 여자 골프에 몰리기 시작했다. 하타오카 나사(26) 등 1998~99년생이 주축인 ‘황금 세대’, 2000년생 이후 ‘플래티넘 세대’를 거쳐 2003~2004년생 ‘다이아몬드 세대’까지 등장했다. 다이아몬드 세대의 선두 주자로 올해 미국 무대에 진출한 다케다는 데뷔 첫 승리를 거둔 데 이어 AIG 여자 오픈에서도 우승 경쟁을 벌이는 등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 투어 시절 거둔 1승과 올해 거둔 1승을 더해 이미 LPGA투어 2승을 기록했다. 다케다는 “적극적으로 미 LPGA투어에 진출하는 선수가 늘고, 세계 무대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많은 일본 선수가 ‘나도 할 수 있다’며 과감하게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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