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인술 베푼 독립투사 이자해 선생을 아시나요
강제이주 조선인 광복군 이끌어
대원들 숙식 돕고 모병 활동 벌여
광복 후 가난한 환자에 무상 진료
영면 40년 만인 2007년 건국훈장


네이멍구에서 중국 국민당군 야전병원장으로 일하면서 임시정부와 연락을 이어가던 선생은 1941년 광복군사령부 국무처장으로 임명돼 일본이 ‘개척단’ 명목으로 강제이주시킨 조선인들을 광복군 쪽으로 이끌었다. 모병을 위해 파견된 광복군 대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1944년 8월에는 김구 주석의 공작지령을 받고 ‘광복군 초모처’ 간판을 내걸고 초모(招募·모병)활동을 벌였다.
중국인 아내와 가정을 이룬 그는 광복 후 김구 선생의 권유에도 귀국하지 못했다. “김구 선생이 인편으로 ‘나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건설을 위해 노력하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마땅히 적극적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혁명에 대한 나의 인식이 부족하고, 가정에 대한 생각이 너무 깊어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쉽다.” 자서전에 남긴 당시의 상황이다.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서 그는 국민당군 참여 경력 때문에 항일운동 업적을 인정받기는커녕 감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55년에는 반후펑(反胡風)운동에서 후펑분자로 몰렸다. 후펑은 중국의 문예평론가로, 의견서를 통해 마오쩌둥의 ‘문학은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는 노선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자 당시 중국 당국은 후펑과 그의 지지자들을 ‘부르주아 반혁명집단’으로 규정한 바 있다. 공산당은 ‘일본사람을 만나면 일본말을 하고 조선사람을 만나면 조선말을 한다’, ‘담배를 피울 때 늘 먼저 자신의 담배를 한 개비 건네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자기 진료소의 의료기기를 조건 없이 인민병원에 헌납한 것은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 등의 황당한 이유로 선생을 체포했다
출소 후 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환자에게는 무상 진료를 베풀었던 선생은 1958년 건강악화로 은퇴한 뒤 베이징으로 이주했고, 1967년 생을 마감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선생의 존재는 2000년대 들어 자서전 ‘이자해자전’이 발굴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됐다. 국가유산청은 선생의 자서전을 “서간도 지역 대한독립단의 조직과 변화, 해전농장의 실제 상황, 광복군 초모활동 등 새로운 사실들이 담겨 있어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라며 국가등록문화유산에 올렸다. 현재 한국 교민이 100명도 채 되지 않는 후허하오터가 독립운동의 한 거점이었음을 알리고, 미개척지나 다름없었던 네이멍구 독립운동사를 일깨우는 결정적 자료이기도 하다.
2007년 한국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면 40년 만이었다. 추모사업을 진행 중인 김병주 전 네이멍구자치구 한인회장은 “코로나19 시기 고향에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자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성묘를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후허하오터=글·사진 이우중 특파원 lo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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