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한 조각에 기도 한 줄… 눈물의 예배, 교회를 짓다

유혜연 2025. 8. 1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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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제암교회 부임한 강신범 목사
“우리 사람들 뼈가 저 뒤에 그대로”
전동례 할머니 말에 유해 발굴 시작
이창식 전 본보 편집국장, 성금 전달
야단 맞아도 제암리 찾았던 오야마 목사
전 할머니와 교회서 만나 한 프레임에

지난 12일 화성시 향남읍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 중인 강신범(84) 제암교회 원로목사. 2025.8.12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제암리 학살의 현장에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이 있다. 한명은 한국인, 또 다른 한명은 일본인이었다.

일제는 1919년 4월 15일 화성시 제암교회에 23명 주민을 몰아넣고 문을 봉쇄한 뒤 불을 질렀다. 당시 21세였던 전동례(1898~1992) 할머니는 가족과 이웃을 잃었고, 평생 교회에 머물며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일본인 목사 오야마 레이지(1927~2023)씨는 제암리 학살을 사죄하려 제암교회 재건 비용을 모아 한국으로 왔다. 1969년 이창식 경인일보(당시 경기연합일보) 편집국장을 만나 부디 제암리 주민들에게 성금을 전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경기연합일보(현 경인일보) 1969년 4월 15일자 1면. /경인일보DB


강신범(84) 제암교회 원로목사는 전 할머니의 말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1980년 31대 담임목사로 제암교회에 부임한 그에게 전 할머니는 “목사님, 아직 우리 사람들 뼈가 저 뒤에 그대로 묻혀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1982년 유해 발굴의 출발점이 됐다. 강 목사는 서울 문화재관리국을 찾아 발굴 가능성을 알렸고 전 할머니는 현장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켰다. 탄화된 유골이 하나 둘 드러날 때마다 이름을 부르듯 기도하며 무릎을 꿇었다.

제암교회를 방문한 오야마 레이지(맨 오른쪽) 목사와 전동례 할머니(가운데), 강신범 목사가 기념촬영을 한 당시 모습. 2025.8.12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이창식(95)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오야마씨로부터 성금을 전달받아 경기도지사에게 전달한 당사자다. 일본인이 직접 주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해 하는 수 없이 경기도를 통해 성금이 전달된 것이다. 이 전 국장은 “1969년 하인천 올림포스호텔 특실에서 만난 오야마씨 일행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지울 수 없는 책임을 느낀다며 일제 36년이 일본인이 남긴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라고 책임을 통감했다”고 전했다.

강 목사는 제암리 주민들이 일본인이 모아온 성금을 거부했던 그 당시를 설명했다. 강 목사는 “당시 유족들이 어림없다. 너희들 돈 가지고 무슨 교회를 짓나. 선열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면서 “그래도 오야마씨는 제암리를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유족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무릎 꿇고 용서해 달라고 했고, 이후에도 몇 차례나 와서 같은 자리에서 사죄했다”고 회상했다.

참사의 현장 제암교회에서 추모와 사죄의 서로 다른 뜻을 담아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은 학살 유해가 모두 수습돼 합동장례가 치러진 1982년이 지나 제암교회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직 전해진다. 살아남은 증인과 사죄를 결심한 일본인의 얼굴이 세월을 넘어 한 프레임에 담겼다.

지난 12일 화성시 향남읍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 중인 강신범(84) 제암교회 원로목사. ‘제암교회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을 들고 있다. 2025.8.12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현재 제암교회 인근, 불타버린 교회 터에 세워진 기념탑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두렁바위 사람들은 순국 열사들의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영원히 이 사실을 전하려 하여, 당시 피화처였던 예배당에 정성을 모아 아담한 기념탑을 세운다.”

일본정부는 여전히 역사 교육에서 제암리 학살을 다루지 않는다. 강 목사는 “일본 각지를 돌며 제암리를 알렸는데 젊은 청중 중에 ‘학교에서 일본이 조선에 다리 놓고 학교 세우고 좋은 일만 했다고 배웠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부끄럽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과거 일본이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화성시 제암리에서 주민 23명을 교회 안에 가둔 뒤 총격과 방화로 학살한 ‘제암리 학살 사건’은 지역의 가장 큰 비극으로 남았다. 사진은 화성시 학살사건이 발생한 제암교회와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2025.8.13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오야마씨와의 만남을 되돌아 본 이 국장은 “여러 차례 거절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신문사를 통해 성금을 전달하고 계속 찾아와 사죄를 표현하는 모습에서 일본인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1969년 오야마씨의 사죄는 일본정부가 외면한 책임을 한 개인이 대신 짊어진 순간이었다. 전동례의 기도와 오야마의 양심이 제암교회를 다시 세웠다.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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