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인 ‘오야마’… 제암리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유혜연 2025. 8. 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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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에 반성’ 일본 목사의 편지
경인일보 통해 성금 100만엔 전하려
주민 거절… 1969년 지면에 남은 기록
남봉진 도지사 전달한 성금 교회 재건에
日 정부 대신 건넨 사죄, 제암리에 닿아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1968년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에게 보낸 편지. /이창식씨 제공

현해탄을 건너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일본인 오야마 레이지(1927~2023).

“이 지면을 빌어서 저는 사랑하는 한국 분들께서 저와 일본인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거듭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지금부터는 전향적인 자세로 친선과 우호가 이뤄지는 정신기반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968년 한 일본인이 화성시 제암리 주민들을 향해 보낸 편지 속에는 절절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이 들어있다. 오야마씨는 편지에서 “36년간 우리 일본인은 조선총독부 밑에서 말로는 다하기 어려울만큼의 악학비도(惡虐非道)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이 그같은 일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저희들은 가슴이 아프고, 오직 그 고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故 오야마 목사


편지는 어떻게 한국에 닿게 됐을까. 시작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복 이후 여러차례 한국을 방문하려 했던 오야마씨는 몇번의 입국거부 끝에 1963년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고, 1965년에 민간인 20여명이 일제에 의해 숨진 학살의 장소, 제암리를 찾았다. 여기서 참사 흔적과 마을 사람의 증언을 듣게 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제암교회 소타사건 속죄위원회’를 꾸리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제암리 학살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경기도지사 남봉진(왼쪽)을 만나 오야마 레이지 목사의 성금을 전달한 이창식 편집국장. /이창식씨 제공


오야마씨는 같은 뜻을 가진 일본인들이 모은 성금 100만엔(당시 한화 1천만원 상당)을 제암리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다. 그는 1968년 서울의 지인을 통해 수원시 교동 185번지 소재 경인일보(당시 경기연합일보사)로 위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당시 유일한 경인지역 신문사를 통해 주민들에게 성금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듬해인 1969년 4월 오야마씨는 인천 올림포스호텔 특실에서 본보 기자를 만나 일본인들이 모은 성금을 전달했다. 그는 제암리교회 기공식에 참석하려 했으나 “가해자의 돈을 받을 수 없다”는 마을 주민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성금을 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호텔에서 성금을 전달한 그는 여러번 사죄의 뜻을 밝히며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1969년 4월 15일자 지면의 기사에 기록돼 있다.

경기연합일보(현 경인일보) 1969년 4월 15일자 1면. /경인일보DB


성금은 본보를 거쳐 당시 남봉진 경기도지사에게로 전달됐고, 일본 교인들의 거듭된 사죄와 ‘속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회 내부 의견이 힘을 얻으며 거절에서 수용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성금 절반은 교회 재건에 쓰였고, 절반은 제암리 주민회관 건립에 쓰였다.

모금으로 세워진 ‘사죄의 교회당’은 1970년 완공돼 1990년대 후반까지 사용됐다. 제암리 주민회관은 여전히 사용된다. 일본정부로부터 듣고 싶었던 처절한 반성과 명확한 사죄는 일본의 한 민간인이자 종교인 그리고 무엇보다 양심가였던 사람에 의해 제암리에 도달했다.

※사랑하는 한국 분들에게 - 오야마 레이지

제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큰 목적은 사죄 때문입니다. 36년간 우리 일본인은 조선총독부 밑에서 말로는 다하기 어려울만큼의 악학비도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이 그같은 일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저희들의 가슴이 아프고, 오직 그 고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중략)

저는 이번까지 한국에 온 것이 네 번째입니다만 언제나 용서를 받기 위해 왔습니다. 제가 한국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나 자신이 한국과 깊게 맺어진 인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의 선조가 한국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저희 형은 서울에서 출생했고, 나의 아내는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저는 도쿄에서 태어 났으나 저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저를 임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국의 여러분에게 친애하는 정을 느끼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같은 자연의 관계 탓은 아니고, 오직 양 민족의 불행한 관계를 알게 된 때문입니다. (중략)

나는 크리스트의 목사로서 경세가 또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각했을 때, 누가 뭐라해도 다음의 사실은 눈 감고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일본은 근근 백년 간에 걸친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인근의 아시아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의 희생을 토대로 하여 번영의 길을 걸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일은 유럽의 열강들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만의 짓은 아니라는 변명이 일본인 가운데는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율법을 믿는 크리스트 신자로서 나는 어느 일방에 의해 그 같은 일이 시대와 함께 단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과 더불어 하느님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중대한 죄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같은 일을 나와는 무관한, 우리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악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이기도 하지만 저의 죄인 까닭에 나 자신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나는 일제 식민지 피해자에 대한 사죄를 위해 가장 가까운 한국을 방문했지만 입국할 수 없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나서 1963년 봄, 최초로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한일 양민족은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민족이 진실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도와서 공동 번영하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중략)

이 지면을 빌어서 저는 사랑하는 한국 분들께서 저와 일본인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거듭해서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지금부터는 전향적인 자세로 친선과 우호가 이뤄지는 정신기반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후략)

/유혜연·신지영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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