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깨어 있는 도시, 호치민 전쟁의 참상 알려주는 전쟁박물관 호치민의 힙지로, 응우옌 후에 스트리트 현지에서 먹는 이열치열 쌀국수 호치민의 밤, 수상버스를 타고 바라본 사이공 강
하루 24시간 깨어 있는 도시, 낮과 밤이 다른 두 얼굴의 도시…. 매 순간 반짝이고 번쩍거리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호치민을 12년 만에 다시 찾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변화보다는 속도를 마주했다.
음식과 술, 분위기에 취하는 호치민 호티키 야시장
변화보다 더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 것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과거의 여행을 끄집어낼 때다. 과거 호치민을 여행했던 기억이 체감상으론 5~6년쯤 지난 것 같은데, 정확히 따져보니 장장 12년이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기나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지난 12년 속 나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미 한번 여행한 나라나 도시를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금 방문하게 되면, 여행을 넘어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인생 두 번째 호치민 여행을 시작하는 과정이 그랬다.
호치민 도심의 여행자 거리인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 초입에 들어서자 12년 전 기억이 아주 또렷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거리에 빼곡히 들어선 식당과 술집, 호텔의 수가 이전보다 확연히 많아진 것 외에는 낡고 지저분한 도로와 좁은 골목길, 오래된 건물 등이 변함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 여행자를 반긴다. 지난 시간 동안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쫓는 데 급급했던 여행자에게 마치 ‘변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메시지를 던지는 분위기다.
(좌)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은 호치민 거리 풍경 (우) 도로를 점령한 오토바이 운전자들
도로를 점령한 오토바이 수는 확실히 시간의 흐름만큼 크게 증가한 모양새다. 상당수의 오토바이 택시가 이에 한몫한다. 호치민에선 꽉 막힌 도로를 이동할 때 차량보다 오토바이 택시가 훨씬 편리하다. 오토바이를 타는 경험은 베트남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액티비티가 아닐까 싶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타 막힌 도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스릴 넘치는 레이싱은 아찔한 쾌감을 일으킨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듯 호치민에서 오토바이는 다소 안전한 교통수단에 속한다. 단, 숙련된 현지인이 운전한다는 가정 하에.
여행자 거리의 작고 좁은 골목길 모습
베트남에선 성인이 되면 남녀불문하고 오토바이 면허증부터 딴다.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바로 오토바이이기 때문이다. 앳된 소녀처럼 보이는 베트남 여인들이 거칠게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도로 풍경은 과거 여행에서도 보았던, 인상깊게 남은 ‘여성 해방 운동’의 21세기 버전과도 같은 모습이다.
호치민 역사지구를 가로질러 도착한 레이싱의 목적지는 전쟁박물관이다. 1964년 8월 7일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 두 나라간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은 베트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전쟁의 슬픔과 아픔은 당시 민간인에게 미친 파괴적인 영향력으로 입증된다.
(위에서부터) 호치민 전쟁박물관 전시장, 전쟁박물관 한편에 전시된 베트남 참전 한국 군인, 전쟁의 피해자가 된 베트남 사람들
호치민 전쟁박물관은 전쟁에 대한 잔혹한 행위, 미국의 군사 행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기록과 역사적 사실이 전시되어 있어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물관 1, 2층에 전시된 수많은 사진과 문서, 유물 등의 전쟁 자료는 가히 충격적이다. 특히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은 366킬로그램의 다이옥신을 포함해 8,000만 리터가 넘는 독성 화학물질을 베트남에 살포했는데, 그 결과 베트남 땅 대부분이 오염되고 당시 약 480만 명의 베트남 국민과 그 후손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어다. 박물관에는 그 자료가 각종 사진과 문서로 남아 있다.
노인과 성인, 어린이, 유아 등 연령에 상관없이 전쟁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 비록 전쟁은 오래전 끝이 났지만 독성 화학물질의 영향과 파괴의 참상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며 이곳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낮의 여행, 열은 열로 다스려야 한다
우연히 발견한 노포 분위기의 쌀국수 맛집
이열치열이다. 덥고 습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의 식사로 쌀국수를 택했다. 전쟁박물관을 나와 곧장 이어지는 좁다란 골목길을 한 십여 분 따라 걸었을까. 맛집을 검색하고 찾아야 하는 수고를 용케 덜어주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노포 분위기의 한 식당을 발견했다. 점심 대목이 지났는데도 서너 개의 테이블이 차려진 좁은 식당 내부는 현지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커다란 냄비에서 팔팔 끓고 있는 고기향 가득 진한 육수 냄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메뉴는 오직 쌀국수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메뉴 선정이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곧장 투박한 플라스틱 볼에 푸짐하게 담긴 쌀국수 한 그릇이 나온다. 이미 땀으로 도배되어 끈적끈적한 몸 곳곳에 고기육수의 개운함이 퍼붓듯이 쏟아진다. ‘열은 열로 다스려야 한다’는 선조들의 지혜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더위에 지쳐 쓰러져도 뜨거운 국수를 매일같이 즐겼던 이유, 후텁지근한 한낮의 날씨에도 노천식당에서의 식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좌)에그 커피로 유명한 리틀 하노이 (우)달걀노른자로 만든 에그 커피
하지만, 커피를 마실 땐 이열치열이 잘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따뜻한 커피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커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카페 천국’으로 통하는 호치민에서 질 좋은 커피 맛의 카페를 찾는 건 식은죽 먹기. ‘에그 커피 천국’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에서 달걀노른자가 띄워진 커피 맛에 홀딱 반해버렸다. 에그 커피는 신선한 달걀노른자, 설탕, 연유, 베트남 고지대에서 자란 로부스타 커피를 섞어 만드는데, 이 과정을 모르고 커피를 맛보면 달걀노른자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블랙커피 위에 풍성한 휘핑크림이 더해진 맛에 가깝다.
커피를 마실 때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오는 크림의 부드러움이 쓰디쓴 커피 맛을 풍성하게 만들어, 둘의 조화가 더도 덜도 말고 완벽 그 자체다. 1940년대 후반 베트남에서 우유가 부족해 우유 대신 달걀노른자로 대체해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이토록 특별한 커피 문화를 형성한 배경으로 전해진다.
(위에서 부터) 골동품 시장 주변 골목길에 조성된 벽화, 호치민 골동품 시장 전경, 앤티크 소품과 중고 물품이 가득한 골동품 시장
호치민 낮의 여행은 골동품 시장으로 이어졌다. 낮에만 문을 여는 앤티크 마켓 카페가 호치민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공식명칭보다 ‘호치민 골동품 시장’으로 더 알려진 이곳은 약 1,000제곱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지어진 카페 내부에 골동품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저마다 테이블을 차려놓고 장사를 한다. 건물 안에 무질서하게 모여 있는 노점 같은 풍경이다. 100여 개의 가판대에는 앤티크 소품과 중고 물품이 가득하다.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기념품이나 고대 유물 컬렉션과도 같은 시계와 보석, 1960~70년대 제작된 빈티지 책과 잡지, 지도 등 보물찾기 놀이하듯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물 내부에 카페와 식당이 마련되어 있어 쇼핑이 목적이 아니어도 한낮의 더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기에도 훌륭한 장소다. 골동품 시장의 많은 상인들은 수익보다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공유하는 소통 공간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장사꾼의 마음 너머로 골동품을 사랑하는 수집가로서의 자부심이 호치민 골동품 시장의 가치를 높인다.
호치민의 밤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좌) 벤탄 시장 외부 전경 (우) 낮보다 화려한 호치민의 밤 풍경
폐쇄가 된 것처럼 보였던 광장 일대가 일몰과 더불어 차츰 본색을 드러낸다. 리어카를 끌고 나온 상인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금세 야시장이 형성된다. 타오를 듯 뜨거웠던 낮의 시간이 저물고, 호치민 여행의 제 2장, 낮보다 더 화려한 밤이 기지개를 켠다. 낮 동안 굳게 닫혔던 술집과 야시장 거리에는 네온사인이 어지러이 뒤섞여 불을 밝힌다. 잠들지 않는 호치민의 밤, 도시 곳곳에 자리한 야시장은 사람들이 밤새 먹고 마시며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는 중추적 공간이다.
그중 ‘벤탄 시장’은 호치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시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독특한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축물 내부에 활기 넘치는 상점이 약 1,500개 규모로 들어서 있다. 먹거리는 물론 의류, 액세서리, 건어물, 과일, 기념품 등 다양한 상품이 즐비하며, 도심의 랜드마크로도 통한다. ‘호티키 야시장’도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꽃시장이면서 먹거리의 천국으로 유명하다.
야시장의 다양한 먹거리
숯불에 구운 고기와 해산물 꼬치 맛에 반하고 거기에 홀짝홀짝 끝도 없이 들이켜는 시원한 맥주는 말해 무엇하리. 음식과 술 그리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취하다 보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싶은 만족감과 함께 더 바랄 게 없는 삶을 마주하게 된다.
호치민에는 ‘밤의 거리’라 불리는 두 곳이 있다. ‘응우옌 후에 스트리트’와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가 그 주인공이다. 응우옌 후에 스트리트가 현대적인 느낌이라면,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는 낡고 예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또한 응우옌 후에 스트리트는 서울의 성수나 을지로처럼 20~30대의 청년층이 다수 찾고,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는 연령에 상관없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 세계 배낭여행자를 위한 호스텔이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에 몰려 있어 여행자 거리로도 인식된다.
응우옌 후에 스트리트에 자리한 야경바
버스커들의 길거리 공연과 술집에서의 라이브 뮤직, 밤새 부어라 마시는 분위기가 짙은 부이비엔 스트리트는 자정이 넘으면 그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한마디로 광란의 밤이 펼쳐진다. 밤의 거리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 있다. 분위기는 다소 다르지만 북적거리는 열기로 잠 못 이루는 호치민의 밤을 경험하는 건 결과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
야경은 ‘박당 부두’에서 감상하자. 활기 넘치는 사이공 강변에 자리 잡은 박당 부두는 호치민의 역사와 문화, 현대적인 활력이 어우러진 장소다. 톤득탕 거리를 따라 약 1.3킬로미터로 뻗어 있는 이 상징적인 명소는 호치민의 과거와 현재를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무성한 녹지와 아름다운 강 전망, 번화한 대도시에서 벗어나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대지면의 분위기, 휴식과 여가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좌) 사이공 강변에 위치한 박당 부두 (우) 호치민 밤의 거리로 통하는 응우옌 후에 스트리트
호치민의 화려한 야경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박당 부두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사이공 강을 유람하는 것이다. 사이공 수상버스는 사이공 강을 이용하는 베트남 최초의 공공 수상 교통시스템이다. 수상버스의 영향으로 사이공 강은 호치민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강변 일대는 산책과 휴식의 중심지이자, 살기 좋고 일하기 좋은 곳으로 자리 잡고 있는 데다 사이공 강변 부지의 상당 부분이 콘도와 아파트, 사무실 등으로 개발되고 있다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수상버스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을 이룬다. 일반 대중교통처럼 쉽고 편하게,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구경하고자 하는 관광객에게도 인기만점이다.
수상버스를 타고 바라본 호치민 스카이라인
박당 부두에서 출발해 투득시의 린동 구까지 약 11킬로미터를 운행하는 수상버스에 몸을 실었다. 선박 뒤쪽 갑판에 놓인 야외 벤치에 앉아 제대로 강바람을 맞으며 도시를 바라봤다. 호치민은 변화하고 있고, 개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잠들지 않는 호치민의 밤, 24시간 깨어 있는 이 도시는 여행자에게 속삭인다. “변화의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