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하면 돼” 선배 말에 충격받고 보성에서 위로받았다[그 마을엔 청년이 산다]
전남 보성군 ‘그린티모시레’ 용수진 대표
전남 보성은 차의 고장답게 눈길 닿는 곳마다 차밭을 볼 수 있다. 특히 회천면 영천마을은 비탈지 차밭과 넓은 저수지가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따뜻한 풍경이 유명하다. ‘그린티모시레’ 용수진 대표(27)가 이곳에서 청년마을의 꿈을 키우는 이유다. 모시레는 전남 방언으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영상연출을 전공한 용 대표는 졸업 전부터 방송 일을 했다. 작가를 시작으로 지상파 방송 뉴스와 예능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다. 드라마 스태프로도 일했다. 활달하고 꼼꼼한 성격이 바쁜 방송 현장과 잘 맞았다.
지난해 용 대표는 6년간 해온 방송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영천마을에 터를 잡았다. 경기 광주시 출신인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보성에 온 적이 없었다.

| ● “쉼 없이 일했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 |
“시야가 많이 넓어졌어요. 세상을 더 알아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점에서 보도국에서 처음 일한 게 행운이라고 봐요.”
6개월 후 그는 다른 지상파 방송의 유명 예능프로그램 제작에 합류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웃을 수 있는 방송을 만들고 싶었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방송을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보람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도 재미있다며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웃을지 고민하는 일이니까 만드는 사람도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편집실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다음에 일한 곳은 드라마 제작 현장이었다. 뉴스나 예능과 달리 한 장면을 위해 모든 스태프가 치열하게 고민하며 몰입하는 분위기에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그는 아예 방송사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밤이고 새벽이고 현장으로, 편집실로 뛰어갔다. 끼니 챙기는 것도 뒤로 하고 일에 매달렸다.
“드라마를 시작하고 침대에서 잔 적이 없어요. 늘 소파나 바닥에서 잤어요. 깊이 잠들면 안되니까요. 항상 소화제를 옆에 끼고 살았어요. 밥을 안 먹어도 소화가 안될 정도였거든요.”
어느 날 한 선배가 용 대표에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계속하면 돼.”
격려이고 칭찬이었지만 용 대표는 충격을 받았다. 5일 동안 출장을 다녀와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상태였다. “나는 지금이 최선인데 이대로 계속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가면 언젠가 쓰러질 것 같고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지난해 초 용 대표는 제작 중인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방송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어디서도 기본은 하지 않을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 ● 60회 넘게 주민과 대화…함께 만들어가는 청년마을 |
“처음에는 믿지 않으셨어요. ‘왜 하필 보성에 오고 싶어 하냐’고 반문하셨죠.”
지난해 6월 ‘한 번 내려와 얘기하자’는 센터 측의 말을 듣고 용 대표는 휴일을 맞아 보성을 찾았다. 1박 2일 펜션을 예약하고 5시간 만에 버스를 갈아타고 온 그를 보자 센터 측은 “진짜 내려올 줄 몰랐다”며 놀랐다. 센터 측은 농민 모임에 용 대표를 소개시켰다. 그를 본 농민들은 대부분 “귀촌이 쉬운 일이 아니다. 적응하기 힘들 수 있으니 충분히 고민해라.”라고 말렸다.
“모두가 말리면서도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시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서 나중에 뭘 하더라도 일단 내려와서 살기로 마음먹었죠.”
그렇게 귀농귀촌지원센터와 농민들의 도움을 받아 선택한 곳이 영천마을이다. 숙소를 잡고 마을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용 대표가 물어볼 때마다 ‘뭐 때문에 그러냐’며 경계심을 보이던 주민들은 살갑게 인사하는 용 대표를 보며 하나둘 마음을 열었다. 지금은 ‘잘 먹어야 한다’며 주민들이 수시로 김치, 옥수수 등을 전해준다. 올해 5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용 대표가 힘들어하자 보성에서 알게 된 어르신들이 꽃다발과 먹을꺼리를 챙겨와 위로해주기도 했다. 딸의 갑작스러운 귀촌에 걱정이 태산이던 용 대표의 가족은 영천마을을 방문한 뒤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알겠다”며 안심하기도 했다.

영천마을에 터를 잡은 지 1년이 지난 용 대표는 이제 서울에 가면 한시라도 빨리 보성에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짧은 시간에 그만큼 마을과 사람들에게 정이 든 것이다.
“이전에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주변의 풍경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있더라고요. 옛날에는 ‘시간이 그냥 흘러갔네’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시간이랑 내가 같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성=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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