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탁 치니 억” 박처원, ‘반민특위 와해’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도 참여

고경태 기자 2025. 8. 1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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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해 불구속 기소된 박처원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이 1993년 2월 선고공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뒤 허탈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처원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치안감)이 해방 직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참여한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박처원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 수사로 악명을 날린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의 책임자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 사건과 함께 옷을 벗었다. 영화 ‘1987’에서 배우 김윤석이 연기한 ‘박 처장’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4일 한겨레가 김성회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국가기록원에서 입수한 ‘1950년 계엄사령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수사 자료를 보면, 박처원은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로 구속된 서용길(1912~1992) 전 의원 수사 과정에서 남로당원 윤병익(당시 41살)을 소환해 조사하는 과정에서‘사법경찰리 순경’ 신분으로 입회했다. 사법경찰리란 경찰 직급 중 경사 이하(경사·경장·순경)를 이르는 용어다. 1927년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나 해방 뒤 홀로 월남해 경찰학교를 졸업한 박처원이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 순경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이미 알려졌지만,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관여한 사실은 이번에 문서로 처음 확인됐다.

박처원이 입회해 1950년 12월3일 작성된 윤병익의 신문 조서에는 “서용길이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다른 의원들과 함께 반동와해공작위원회라는 조직의 하부자로 명단을 제출하고 우익 민족진영을 자수시키는 공작을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서용길 전 의원은 다음날인 12월4일 진행된 합동수사본부 신문에서 이러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11월 재구속된 반민특위 특별검찰관 출신 서용길 전 의원과 관련한 윤병익의 증인신문조서에 등장하는 박처원(朴處源). 증인신문과정에 입회한 ‘사법경찰리 순경’으로 적혀있다. 국가기록원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11월 재구속된 반민특위 특별검찰관 출신 서용길 전 의원과 관련한 윤병익의 증인신문조서. ‘순경 박처원’의 입회하에 신문을 했다고 나와 있다. 국가기록원

1950년 9·28 서울 수복 뒤 김창룡(1920~1956) 특무부대장 산하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합수부)에서 검사 오제도(1917~2001)와 함께 남로당원 및 부역 혐의자 검거 임무를 수행한 박처원의 이력을 뒷받침하듯, 이번에 확인된 문서는 바로 그 합수부의 피의자 검거 전말 보고서다. 60여쪽 분량의 한문 필기체로 된 이 보고서는 1950년 12월 합수부가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수감 중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풀려난 서용길 전 의원을 재구속한 뒤 취합한 피의자 동행보고서, 구속 기간 연장 신청서, 피의자 및 증인 신문조서, 공판조서 등으로 구성돼 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5~8월 이승만 정부가 북한 공작원 정재한에게 포섭된 의원 명단의 암호 문서를 발견했다는 등의 이유로 반정부 성향 소장파 국회의원 15명을 구속한 사건인데, 이때 수사검사가 오제도였다. 수사 과정은 불법체포와 감금·고문 및 가혹 행위투성이였다. 결정적 증인인 정재한은 재판 중 다른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이는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피해 확인)으로도 확인된 바 있다.

지난 6월10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을 개조해 만든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제38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을 마친 우원식 국회의장,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당한 대공분실 509호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박처원은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였다. 공동취재사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의원들은 반민특위의 주축으로 활동하던 이들이다. 반민특위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제헌국회 의원들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에 따라 그해 10월 구성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들을 처벌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도록 했으나, 친일파와 이승만 대통령의 반감을 사며 1순위 제거 대상이 됐다. 그리고 국회 프락치 사건을 거치며 와해됐다.

소장파 국회의원으로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이었던 서용길은, 1949년 국회 프락치 혐의로 구속된 의원 13명 중 12명이 북한으로 갔지만 홀로 남한에 남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뒤 수감 중인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렸음에도 “자진해서 안 나겠다”며 버티다 동료들에 의해 끌려 나왔고, 9월에는 검찰청에 찾아가 “나를 법에 따라 처리해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용길은 11월 합수부에 의해 재구속돼 검찰로부터 25년형 구형을 받았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박처원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 1990년 8월의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문으로 얼룩진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박처원은 결국 40여년 뒤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몰락했다. 그는 박종철 고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다음 날인 1월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이후 5월에는 박종철 고문 사건 축소 혐의로 구속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1999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 도피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말년에는 당뇨와 치매 등을 앓다가 2008년께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역사사회학자인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박처원이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말단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접한 적이 없다”며 “반공주의로 똘똘 뭉친 박처원이 ‘사찰’의 막내에서 민주화 직전까지 공안과 대공수사 책임자로 승승장구한 것은 그가 40년 가까이 사상범(또는 공안범) 수사 기법이라는 미명하에 자행한 고문과 조작으로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가 양산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박처원으로 대표되는 공안경찰 세력 역시 민주화 이후에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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