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살리는 약, 나라 살리는 독립운동"... 민족자립 기반 쌓은 두 약업인
독립운동과 국민건강 증진 힘쓴 유일한·민강
유, 의약품 개발·수입해 보건의료 환경 개선
비밀 항일 작전 '냅코'에 '암호명 A'로 참여
민, 국내 첫 양약 '활명수'로 독립 자금 마련
동화약방서 임정 연락망 '서울 연통부' 운영

1926년,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국의 모습은 참담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산은 메말랐고, 농부들은 깡마른 채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이 모습을 본 30대 청년은 의약품, 위생용품을 판매하는 기업을 세워 국민 보건 향상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1895~1971년)다.
"독립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제약산업 개선"
유 박사의 유일한 손녀인 유일링(한국명 유은영) 유한학원 이사는 12일 본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할아버지 시대에는 독립이라는 목표와 보건·의료라는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청소년기를 모두 미국에서 보낸 경험의 영향이었다. 유 이사는 "할아버지는 아홉 살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성장하며 선진적인 보건·의료 환경과 공동체 정신을 경험했다"며 "조국의 절박한 상황을 목격하고, 미국과의 거대한 격차를 절감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선 '라초이'라는 식품 회사를 운영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에게 숙주나물을 판매했는데, 숙주나물을 실은 배달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가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유명세를 탔다. 사고 이후 오히려 매출이 올랐고, 미국 전역에 숙주나물을 공급하게 됐다. 이때 모은 자금으로 유 박사는 귀국해 본격적인 사업에 돌입했다. 당장 화장지, 비누 같은 위생용품은 물론, 화장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해 국민 건강과 농촌 경제에 힘을 보탰다.

의약품을 직접 개발하는 데는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의사 중 한 명이었던 배우자 호미리 여사 역할이 컸다. 호 여사는 함께 귀국해 소아과 의사로 활동했는데, 가벼운 부상이나 통증에 쓸 연고가 없었다. 수입품은 비쌌다. 이에 유한양행은 1933년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을 개발해 출시했다. 유 이사는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통해 의료 행위와 의약품이 가진 힘을 목격했다"며 "편지와 가족들 얘기를 들어보면, 할아버지는 독립 이후까지를 염두에 두고 제약산업 전반을 개선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유 박사가 '독립이라는 목표'를 품은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1909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박용만 선생(1881~1928)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에는 미주 한인들의 3·1 운동이었던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참석했다.
1930년대 유한양행이 '친미 기업'으로 찍혀 원활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유 박사는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또 1945년 비밀 항일 무장투쟁 프로젝트 '냅코(NAPKO)'에 암호명 A로 참여했지만,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유 이사는 "할아버지는 OSS 복무 사실을 자녀들에게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고, 제가 아는 한 할머니도 모르셨다"며 "수십 년이 지나서도 자랑하지 않으신 것은 아마 냅코 작전 참여를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연통부 행정책임자는 동화약방 설립자 아들 민강"
유 박사가 귀국하기 전부터 약업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던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좋은 약으로 나라와 국민을 구한다'는 제약보국(製藥報國)의 신념으로 1897년 동화약방(현 동화약품) 초대 사장을 지낸 민강(1883~1931) 선생이다. 동화약방은 아버지 민병호가 개발한 국내 최초의 양약 '활명수'를 판매했다. 당시에는 급체나 복통으로 숨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활명수는 문자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고 불리며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의약품 사용설명서 '동화약방용약보감'을 배포해 국민건강 증진에 힘쓰기도 했다. "약방이 판매소에 그치지 않고 인명의 위태로움을 돌보는 위생소(보건소)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게 동화약품 측 설명이다. 민 선생은 설명서 서문에 "인명의 생사가 중대한데 남의 불행과 질병을 행운으로 여겨 이익을 취하겠는가. 우리 동화약방에서는 깊은 산골에서 약초를 캐는 여자아이에게까지 돈이 돌아가게 한다"고 썼다.

민 선생은 '생명을 살리는 약' 보급과 '나라를 살리는 독립운동'을 사실상 하나의 행위로 수행했다. 활명수를 팔아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댔고, 돈을 직접 전달하기 어려울 때는 활명수를 중국에서 팔아 쓰도록 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며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활명수를 지참하고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민 선생은 1909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가입했고, 1919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 간 연락을 담당하는 '서울 연통부'를 동화약방에서 운영했다. 연통부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내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조직의 핵심이었다. 1995년 서울 중구 동화약품 본사 앞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서울 연통부의 행정책임자는 동화약방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이었는데 독립운동 중 그가 일경(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연통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던 그는 1931년 건강 악화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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