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와 권력 내려놓고 항일 독립투쟁…안동 명문가 얼이 서린 500년 고택

조봉권 선임기자 2025. 8. 1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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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의 ‘안동 임청각’을 가다

- 아들 손자 손부 등 목숨걸고 日에 저항
- 한 집안에 서훈 받은 유공자만 11명
- 선연한 선비정신, 고택에 오롯이 담겨
- 日, 정기 끊으려 앞마당에 철도 놓기도

- 2018년 뒤늦게나마 가옥 등 복원사업
- 광복 80주년 잊지말아야 할 우리 역사

안동 임청각(臨淸閣) 안에 들어가 군자정(君子亭)으로 올라서려고 돌계단을 밟으려는데, 왼쪽에 ‘임청각 작은 전시관’이라는 소담한 현판이 보였다. 현판 아래 좁은 문으로 들어가니, 마당이다. 앞뒤 양옆으로 안채와 바깥채 한옥 건물이 처마를 맞대고 서 있다 보니 하늘이 네모지게 보였다. 건축에서 말하는 중정(中庭)이구나 싶었다. ‘임청각 작은 전시관’은 건물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중정의 벽면과 안쪽으로 폭 들어간 공간을 활용해 차렸다. 작지만, 내용이 굉장히 알차서 하염없이 전시물을 보게 됐다.

지난 8일 찾은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 모습. 오른쪽의 품격 있는 한옥이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이다. 이 집에서는 낙동강이 잘 보였다. 광복절을 앞두고 행사가 많은지, 마당에는 의자가 깔려 있다.


‘32일간의 망명 여정(안동~만주 횡도천)’이라는 제목의 전시물에 눈길은 오래 머물렀다. 위대한 독립투사이며 이곳 안동 임청각을 독립투쟁의 산실, 한국 명문가의 상징으로 가꾼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 일가 50여 명이 일제의 강제 국권 침탈 직후인 1911년 찬 겨울 기득권과 부를 모두 내려놓고 독립투쟁을 펼치려고 만주로 가던 과정을 지도와 함께 걸어두었다.

“1911년 1월 4일 노비 해방 후 일가친척과 조촐한 식사-1월 5일 의장소에 100꿰미 기부, 족조(族祖) 동곽의 빚 갚는 데 30꿰미 보조, 동도서숙 학생들과 인사 후 안동 출발….” 이 어른은 노비를 풀어주고, 빚진 친지를 돕고,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재산을 처분한 뒤 가족과 독립투쟁 길로 들어섰다. 여정은 이렇게 이어진다.

“1월 8일 울음을 터뜨리는 손녀를 달램-1월 9일 봉대(상주 인봉) 사위 강남호 집에 도착-1월 10일 울음을 터뜨리는 딸을 달래고 작별-1월 11일 추풍령 도착-1월 12일 오전 2시 출발(경부선), 8시 12분 서울 도착-1월 13일 양기탁 만남-1월 19일 경의선 열차 승차, 10시 개성을 지나고 오후에 평양, 밤 신의주 도착-(중략)-1월 22일 청국 돈으로 환전, 일본인 서점에서 만주 지도 구입-1월 25일 아들 준형 및 동생 봉희 일행과 만남-1월 27일 발거(바퀴 없는 썰매 수레)로 압록강을 건너 단동 도착-(중략)-2월 7일 횡도천에서 처남 백하 김대락 가족을 만남.” 압록강 칼바람을 상상했다. 울음을 터뜨린 석주 선생의 딸을 떠올려 보았다.

2020년 12월 16일 임청각 마당을 80년 동안 자르고 있던 당시 중앙선 철로 위로 마지막 열차가 달리는 장면. 이 철로는 2021년 이전했다.


▮석주 이상룡 집안의 빛나는 독립투쟁

지난 8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경남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 갔다. 임청각은 안동 도심과 멀지 않은 낙동강가에 있어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바로 옆에는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과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국가민속문화재)이 있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입니다.” ‘대한민국 대표 명품 고택 임청각’ 홈페이지에 있는 소개 글 제목이다. 1519년 지었다고 하니, 500년이 넘었다.

임청각 중심에 있는 군자정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임청각’ 현판은 퇴계 이황 선생의 글씨다. 군자정 안에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등 명사가 쓴 한시가 걸려 있다. 거대한 한옥 저택인 임청각은 500년을 살림집으로 내려온 역사만으로도 지극히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15일은 광복절이다. 안동 임청각이 빛나는 더 큰 이유는 군국주의 일제에 맞서 조국 광복을 위해 ‘임청각 집안’이 펼친 놀랍고 위대한 투쟁의 역사에 있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 집안 종택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이 집에서 장손으로 태어났다. 조선 시대 유림 가운데 남인 계열인 석주 선생 집안은 임청각 같은 대종택을 꾸려 갈 정도로 부유했다. 이 가문이 이웃과 백성에게서는 존경과 신망을 받고, 정의와 도리를 지키는 데는 대쪽처럼 선연한 선비 정신을 가풍으로 가꿨다는 점을 현장에서 선명히 느꼈다. 다시 ‘임청각 작은 전시관’으로 가보자.

“…1895년 을미의병 때 군자금을 지원하고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회장 이상룡)를 설립했다.” 이런 기록도 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이상룡은 1만 금을 전달하여 의병기지를 건설하려 하였으나 기밀 누설로 실패.” 이 정도면, 호의호식하며 민족의 어려움 따위 외면하고 살 수 있었을 거대한 집안이 목숨 걸고 명운 내놓고 일제에 저항했다.

끝내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석주 선생은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아예 간도(만주)로 넘어가 독립전쟁을 펼친다. 그가 간도에서 민족을 위해 실천한 전쟁은 치열했다. 경학사·부민단·한족회 활동을 거쳐 한민족 독립투쟁에서 극히 중요한 신흥무관학교도 이 집안이 중심이 돼 만들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쉽게 말해 대통령)에 석주 이상룡이 임명된 사실만 봐도 이 어른, 이 가문의 헌신과 의지를 알 수 있다.

‘임청각 집안’은 서훈을 받은 국가유공자만 11명 나왔다. 석주 선생과 아내 김우락,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손자며느리 허은, 동생 이상동 이봉희,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종숙 이승화이다. 명문가다.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소중한 책을 남겼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철길에서 날아온 녹이 쌓여 색이 바뀐 임청각 기왓장이다.


▮정신과 품격이 깃든 공간

일제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임청각 작은 전시관’에 특히 인상 깊었던 전시물이 세 가지 있다. 일제가 1942년 중앙선 철길을 놓으면서 애초 계획한 단순하고 가까운 노선을 철회하고 철교 2개, 터널 7개 만들어가며 5㎞ 돌아가도록 개설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 그 하나다. 토목·건축 쪽 사람은 이걸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이 그림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새롭게’ 놓은 중앙선 철로는 임청각 마당을 정통으로 끊어 먹으면서 집 앞으로 지나갔다. ‘임청각 죽이기’였던 셈이다.

그 옆 사진은 2020년 12월 16일 19시 35분 임청각 마당을 잘라 먹은 철로 위로 마지막 열차가 달리는 장면이다. 80년 만에 중앙선 철길 노선을 고쳐서 바로 놓으면서 기존 철로가 폐선됐는데, 그 직전 마지막 열차 통행을 찍었다. 이 사진을 봐도 기가 찬다. 임청각 건물에 닿을 듯 코앞으로 열차가 지나간다. 거듭, 석주 가문과 임청각에 대한 일제의 적개심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세 번째는 ‘철길 녹으로 변색된 기왓장’이다. 전시관 한쪽에 낡은 기왓장이 잔뜩 쌓여 있다. 기와는 녹과 먼지가 더께더께 눌어붙어 완전히 변색됐다. 임청각은 철로에서 곧장 날아오는 녹과 먼지를 80년 세월 뒤집어썼다.

많이 늦었지만, 우리 정부는 나섰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예산 280억 원으로 ‘안동 임청각 복원사업’에 들어갔다. 그간 많이 정비가 이뤄졌다. 이 사업 완료 시점은 2025년, 올해다. 안동시 관계자는 “역사문화공유관 건립 등 복원 사업은 오는 12월께 완료될 예정”이라며 “다만, 임청각 가옥 2개 동 재현 공사 등은 2027년께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임청각은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한 품격 있고 고풍스러우며 큰 한옥이다. 그 속에서 은은하게 ‘정신’이 빛나는, 그런 여행지다. 전통 건축미를 느낄 수도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숙박도 할 수 있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초대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 나라 위한 얼과 글’ 특별전이 지난 3일 시작해 오는 31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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