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에 가난까지 대물림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각종 질환 일반인보다 압도적으로 높아
정부는 여전히 '입증된 바 없다' 불인정
2세 지원 법률 국회서 기약 없이 표류

◇유전으로 힘들어 하는 2·3세 = 한정순(66)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은 어릴 때 특별한 질병은 없었지만 잘 넘어졌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양쪽 다리에 통증이 시작됐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졸업 후 곧장 대구에서 취직해 주·야간 근무로 직장생활을 했지만 심한 통증 탓에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지 못했다. 이곳저곳에서 짧은 직장생활을 반복하다 24살에 결혼했고 이듬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다리 통증이 점점 심해져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결국 서른 두살 때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가 2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우리 형제·자매가 다들 힘들게 살아가지만 저를 살리려고 조금씩 보태줘 수술을 했다"며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이후에도 통증은 반복됐고 다른 곳까지 아파 계속 병을 달고 살며 고통과 싸워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6차례 수술을 받았다. 발목 수술, 자궁근종 수술, 담낭 수술 등을 더하면 모두 12번 수술했다. 고혈압, 우울증, 신경장애 불면증, 근육이완증, 어지럼증, 위장병까지 달고 살아간다.
병원비에 약값도 만만치 않아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시어머니는 구박했고, 등 돌린 남편의 마음도 돌아오지 않아 결국 이혼했다. 큰아들을 데려 오고 싶었지만 함께 나락으로 빠질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그는 찜질방이나 여관 청소, 여동생 손자 육아, 간병사 등을 하며 죽지 못해 어렵게 버티고 또 버텨냈다.
한정순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등 가족 14명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됐고, 광복 이후 고향 합천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고통이 원폭 후유증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2003년 반핵평화인권 운동가 김형률 씨를 만난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혹시 유전이 아닐까 의심은 했지만 확신은 못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이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됐다"며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가 문제 해결에 나서자는 생각에 김형률 씨가 하는 운동에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일을 하면서 회원들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회원들은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걱정합니다. 그리고 병원비 걱정을 합니다. 이게 원폭 피해를 겪는 부모 마음입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몸이 불편한 자식을 하루라도 먼저 내 손으로 보내고 따라가는 게 바람입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끝나지 않은 형벌' 핵의 유전 연관성 = 한국 정부는 원폭 후세 지원을 회피하는 근거로 '유전적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와 '일본에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 없었다.
그러나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의뢰해 진행한 실태조사를 보면 쉽게 연관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원폭 1세 1256명을 조사했는데 백혈병·골수종과 같은 림프, 조혈 계통의 악성 신생물(비정상적 조직)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70배가 높았고, 빈혈 52배, 우울증 93배, 정신분열증 936배, 갑상선 질환이 21배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심근경색이나 협심증 19배, 위·십이지장 궤양 13배, 천식 9.5배, 자궁암 8.7배, 위암 4.5배, 뇌졸중 3.5배, 당뇨병 3.2배, 고혈압 3.1배로 조사됐다. 발병 위험이 다양한 병증에 걸쳐 높게 나왔다.
원폭 2세 1226명을 대상으로 한 우편 설문조사 결과, 남성은 같은 연령대 일반인보다 빈혈 88배, 심근경색과 협심증이 81배, 우울증 65배, 정신분열증 23배, 천식 26배, 갑상선 질환이 14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위·십이지장 궤양 9.7배, 대장암 7.9배, 뇌졸중 6.1배, 고혈압 4.8배, 당뇨병 3.4배로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은 심근경색과 협심증 89배, 우울증 71배, 유방 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정신분열증 18배, 위·십이지장 궤양 16배, 백혈병이 13배 높았다. 또 갑상선 질환 10배, 위암 6.1배, 뇌졸중 4.0배, 당뇨병 4.0배, 고혈압이 3.5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1세대 부모 병증이 후세에도 나타나는 사례가 많았다. 지금까지 구술 기록에서도 부모가 앓았던 증상과 비슷한 2세가 많았다.
인도주의의사협회는 보고서에서 "방사선의 인체 영향에 관해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미국국립과학아카데미도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선이라도 인체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하고 있다. 2세의 전 생애에 걸쳐서 평생 건강 영향 추적 조사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피해자 대상에 '후세' 없는 특별법 = 원폭 피해자 후세에 대해서는 정확히 현황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를 진행한 바도 없고, 굳이 스스로 밝힐 이유도 없다. 아무런 지원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편견과 차별받는 부작용만 발생할 수 있어서다. 후손회에 등록된 전국 회원 수는 4500여 명(지난해 11월 말 기준)이며 질병과 싸우는 2세 환우회원은 1300여 명에 이른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원폭 피해자를 위한 법률 제정 움직임은 2005년 시작돼 10년이 지난 2016년에야 어렵게 처리됐다. 그러나 '원폭 2세' 내용이 빠져 반쪽짜리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피해자 범위를 '1945년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일본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있었던 사람과 당시 임신 중 태아'로 한정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은 '원폭 피해자의 자녀까지를 포함한 정확한 실태조사와 의료지원 확대, 이들의 복지 증진과 생활 안정을 위한 장례비 지원, 복지사업 수행을 위한 사무국 설치 의무화'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국회에서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