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도 없던 642명 '유령부대'… "나라 다시 잃을순 없다" 日각지서 모여

김성훈 기자(kokkiri@mk.co.kr) 2025. 8. 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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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부대'.

미국 CBS방송의 조지 하먼 당시 도쿄지국장이 1952년 9월에 재일학도의용군을 다룬 기사에서 쓴 표현이다.

재일학도의용군은 1950년 9월 12일 1진이 요코하마항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참전한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목숨을 걸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말부터는 재일학도의용군의 재입국 자체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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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학도의용군은
출정식 취재하던 기자
붓 내려놓고 참전도
전후 재건에도 이바지
88올림픽 성금 보내고
신한은행 설립 주도
재일학도의용군 장병들이 출정 직전인 1950년 9월 6일 이름과 결의를 남긴 태극기. 국가보훈부

'유령부대'.

미국 CBS방송의 조지 하먼 당시 도쿄지국장이 1952년 9월에 재일학도의용군을 다룬 기사에서 쓴 표현이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선에서 피 흘린 이들을 두고 '6·25전쟁에 일본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미국인 기자가 사실을 밝히는 기사에서 붙인 서글픈 별칭이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1950년 9월 12일 1진이 요코하마항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참전한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목숨을 걸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박운욱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장은 "642명의 동지 중에서 절반 정도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나머지는 나처럼 유학이나 취업을 위해 일본에 온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열여덟 고등학생부터 마흔다섯 중년까지 나이도, 사는 곳도, 직업도 다양했지만 '내가 죽더라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이들은 해외 유학 중이던 이스라엘 청년들의 자발적 귀국과 참전으로 유명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보다 17년 전인 1950년에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귀국했다.

박 회장처럼 가족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참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갓난쟁이 자식과 아내를 두고 참전한 사람까지 있었다. 재일학도의용군 1진 출정식을 취재하던 동포신문 기자가 현장에서 붓을 내려놓고 참전을 택하기도 했다.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지바현 본부에서 찍은 재일학도의용군 출정식 기념사진. 앞줄 왼쪽 둘째가 박운욱 회장. 재일학도의용군 홈페이지

전쟁 이후 일본 측의 비협조로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초를 겪은 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말부터는 재일학도의용군의 재입국 자체를 막았다. 일본에서 허가받지 않고 임의로 출국한 사람들이라는 논리였다. 이들은 이후 오랜 기간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며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휴전 이후에도 한국의 재건과 발전을 위한 재일학도의용군의 헌신은 계속됐다. 대표적인 인물은 고(故) 박병헌 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단장이다.

그는 민단 단장으로 재일 한인사회 단결을 이끌고 한국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일본에서 88서울올림픽 후원회를 주도하며 무려 525억원을 모금해 조국에 전하기도 했다. 또 '재일한국투자협회'와 '신한은행' 설립에 이바지하며 재일동포 기업인들의 모국 투자 활성화와 금융 발전의 밑돌을 놓았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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