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1장] 전주성 입성(208회)

전라감사가 집무하는 선화당의 앞마당과 객사(客舍) 뜰에 동학농민군들이 군집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며 환호하였다. 그런 가운데 공삼덕의 놀이패가 풍물놀이 공연을 벌였다. 북, 징, 꽹과리, 장구가 힘차게 휘둘러지고, 원을 만든 주위로 인간 탑, 상모돌리기, 무동타기, 진 놀이가 벌어졌다. 전라감영은 완연 축제 분위기로 무르익어갔다.
전라감영은 오백 년 조선 왕조의 혼이 담긴 상징 건물이다. 그런 감영을 동학농민군이 접수한 것은 왕조의 뿌리를 흔들고, 민초에 의한 민본의 세상을 다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전라감영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곳이다. 이성계의 어진은 조선의 국조로서 개국초부터 전주와 왕실 등 주요한 곳에 총 26점이 특별히 모셔져 있었으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초상화 1점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전봉준은 서문을 통과해 선화당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정중앙에 정좌했다. 그 주위로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오권선, 김도삼, 정익서, 배상옥, 김응문, 송경찬 등 각 부대 지휘관들이 둘러앉았다. 그들 뒤편에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창을 들고 호위하고 서있었다. 혹시 모를 중앙군과 감영군이 기습을 대비하여 호위하였고, 사대문에도 초병들을 배치하였다. 선화당 내부는 다소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긴장감을 풀려는 듯이 전봉준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전라감영은 일찍이 완영(完營)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완산 땅에 있기 땀시 완영이라고 하지요. 전주의 원래 지명은 완산주였잖습니까."
이를 받아 다른 장수가 감격한 표정으로 무용담을 말했다.
"오늘의 전주성 무혈입성은 장날이라는 택일이 주효했소이다. 장터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지요. 그것을 활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도대장의 전술이었소이다. 동도대장은 농민군의 상당수를 장꾼으로 변복시켰소. 우리 군사 일만여 명 중 이삼 백을 장꾼으로 변장시키니 장터가 미어터질 정도로 꽉 찼소. 이들이 모두 동학농민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몰아간 것이었소. 그리고 학익진이 아니라 일자진(一字陣)으로 토끼몰이를 하니 대적하려던 경군과 지방군, 보부상군이 갈팡질팡 헤매고, 징집된 지방군 병사들은 상당수 도망을 가버렸소. 우리가 별다른 전력 소모 없이 승리하여 전주감영을 접수한 것은 우리 군사력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사기 떨어진 무능과 오판이 영향을 주었소이다. 시운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오. 우리는 나라를 새롭게 개조하겠다는 사명감이 불타는 반면에, 저들은 왜 그곳이 와있는지 모르겠다는 무력감이 지배하였소이다."
"맞소. 지방군은 그동안 따르던 전라감영장이 처단되자 더욱 사기가 떨어지고, 군무에 복무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소. 그런 패배주의가 팽배하니 무슨 훌륭한 전술이나, 신식 무기를 갖추었더라도 이길 수 있었겠소?"
"처형된 전라감영장이 누구라고 했지요?"
동도대장 전봉준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김시풍이올시다. 그는 환갑을 맞았으나 기골이 장대한 노장으로 전주감영의 영장으로서 주민의 애로를 들으며 온건한 선무 정책으로 동학농민군을 다스리려고 했지요."
그러나 동학농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파견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라감사 김문현과 짜고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하여 전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를 비롯해 부장 김영배 김용하·김동근을 전주 남문 밖 장터에서 효수하였다. 홍계훈의 이런 조치는 김시풍에 대한 개인적 원한도 작용하였다. 김시풍은 젊었을 적 홍계훈의 상관이었으며, 한때 갈등관계에 있었다. 사감(私感)을 이런 식으로 처리해버렸으니 감영군들이 따를 리 만무한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처형은 감영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싸울 의사를 방기할 뿐 아니라 대부분 패주의 길을 택했다. 그중 일부는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이러니 최신식 포와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동학농민군 숫자가 관군보다 월등히 앞서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승리를 평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