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차이나 쇼크'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 정부의 책무

에틸렌 생산 규모 3위의 여천NCC(나프타분해시설)가 가까스로 부도 위기를 넘겼다. 연간 1조 원 대의 영업이익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하던 우량 기업이 2022년부터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도 236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런데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는 여천NCC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여천NCC에서 시작된 위기가 전방위로 확산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현실이다. 43만 명의 인력을 고용하는 2만 7000여 개 석유화학 기업 모두가 위험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 차이나 쇼크에 흔들리는 국가기간산업
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국가기간산업의 붕괴가 현실화되고 있다. 원인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중동의 무차별적인 시설 투자와 악의적인 저가 공세로 시작된 ‘차이나 쇼크’가 거대한 쓰나미로 변해서 밀어닥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로 글로벌 경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도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악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종잡을 수 없는 관세 전쟁의 파장도 심각하다. 국제 사회가 그야말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중국이 지난 3년 동안 설치한 에틸렌 생산 설비가 무려 2500만 톤에 이른다. 중국의 설비 투자가 끝난 것도 아니다. 2027년까지 다시 1500만 톤의 설비를 추가할 예정이다. 중동의 과잉투자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가 사우디아라비아·중국·한국에 건설 중인 7개의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을 순차적으로 가동하면 연 1150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양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LG화학의 생산 능력 330만 톤의 3.5배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이다.
작년 기준으로 전 세계적인 에틸렌 생산 능력은 약 2억 2900만 톤이었고 수요는 1억 8800만 톤이다. 누가 보더라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결국 원가 개념이 희박한 중국과 중동이 국가 수준에서 무차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맹목적인 과잉 투자가 전 세계의 소재 공급망을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석유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통해 분석한 석유화학산업의 현실은 암울하다. 동북아 석유화학 시장의 불황이 2030년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3년 안에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절반이 사라질 수 있다"는 극단적인 분석도 내놓았다. 적극적인 대응이 늦어지면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할 기회조차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석유화학산업의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도 누구나 알고 있다. 중국이 집어삼키겠다는 범용(汎用) 제품의 생산을 줄이고 고부가가치의 스페셜티에 대한 신규 투자를 최대한 확대하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 장치 산업의 구조조정은 감당하기 어려운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민간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어쩔 수 없이 정부가 앞장서서 밀어붙였던 ‘관치형’ 구조조정의 낡은 경험을 되살릴 이유는 없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이제 석유화학산업의 구조조정은 소수의 관료가 정부의 자본력을 동원해서 좌지우지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졌고 기술력이 너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제는 민간의 역량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다. 실제로 국가 경제에서 석유화학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작년 수출액만 480억 달러로 반도체·자동차·일반기계에 이어 4위다.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23년 111조 원으로 전체 산업 중 5위였다.
석유화학산업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의 후방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그런 석유화학산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고 기업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의 교통정리를 해줘야 한다.
문제는 정부의 경직된 규제와 무능력이다. 무엇보다도 엄격한 공정거래법으로 무장한 정부가 기업의 자발적인 구조조정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생산량과 시설을 감축하기 위한 기업의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마저 공정거래법이 철저하게 금지하는 ‘담합’에 해당한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기업의 자발적인 결합과 자유로운 연구 개발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적 환경’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
정부의 무관심도 심각하다. 작년 12월 23일 어설픈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던져놓은 것이 고작이다. 올해 상반기까지 “구체적인 후속 조치”를 내놓겠다던 약속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정권 교체기의 혼란과 맞물렸다는 것은 옹색한 변명이다.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차별적인 통상 압력에 정부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가기간산업을 챙겨야 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외면해 버리고 있다.
정쟁에만 매달리는 정치권도 밉상이다.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관심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기업의 권한은 최대한 축소하고 책임은 무조건 기업에게 떠넘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정치권의 입장에서는 환경과 기후위기도 기업을 옥죄는 훌륭한 핑계다. 오로지 이념과 팬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 정치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 굴뚝산업도 포기할 수 없다
석유화학산업이 국민 건강과 환경을 위협하는 ‘위험산업’이라는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이 절박하다. 인류가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개발한 모든 기술은 근본적으로 위험할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안전하고 깨끗한 ‘친환경 기술’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은 확실하게 버려야 한다.
석유화학 산업이 제공해주는 ‘에너지’와 ‘소재’가 없으면 경제와 생활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아무리 더럽고 위험한 기술이라도 안전에 대한 투자와 제도를 충분히 강화하면 안전하고 깨끗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도전적인 자신감을 강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친환경' 기술에 무작정 매달릴 일이 아니다. 턱없이 비싸기만 한 '지속가능항공유'(SAF)가 화학산업을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거대한 항공기의 운항에 필요한 SAF 생산에 필요한 폐식용유의 양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
항공기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모두가 식용유에 튀긴 통닭을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 친환경의 허울에 속아서 형편없이 실패해버린 ‘바이오디젤 의무 혼합’ 제도의 경험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
화학산업을 거부하는 '화평법·화관법'도 확실하게 개정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만들어놓은 화평법·화관법은 사실상 ‘화학산업퇴출법’이다. 더욱이 화평법·화관법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EU의 화평법인 REACH의 목표는 단순히 ‘국민 건강과 환경 보호’가 아니다.
‘인터넷 시장에서 화학물질의 자유로운 유통 보장’과 ‘화학산업계의 경쟁력과 혁신력 제고’가 훨씬 더 중요한 목표다.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 정보를 유럽에서 비싼 비용을 들여서 구입해서 환경부에 비공개로 등록해 놓기만 하면 국민 건강과 환경 보호가 가능해진다는 순진한 기대는 확실하게 접어야 한다.
정부의 반(反)기업적 정책도 확실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망국적인 탈원전 정책이 만들어낸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무작정 기업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기업주가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한다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석유화학산업에서 전기요금이 매출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에 달한다. 서민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라는 알량한 핑계로 무작정 인상해버린 ‘산업용 전기요금’이 석유화학산업의 부실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국민과 환경을 지키는 노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다고 에너지와 소재를 공급해주는 석유화학산업과 같은 ‘굴뚝산업’을 통째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처럼 에너지와 천연자원이 부족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무조건적인 ‘자연 회귀’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더 나은 기술과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친기업 정서’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기술만능주의적 발상이라도 국가적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가 없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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