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걸고 만세 부른 청양 민초들… 이제라도 이름 빛내주니 경사”[완전한 광복, 하나된 한국]

정충신 선임기자 2025. 8. 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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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한 광복, 하나된 한국
2부 ‘광복을 만든 사람들’ - (2) 정산만세운동 60여명 유공자 서훈
1919년 4월, 나이·신분·직업 초월 ‘정산3·1만세운동’ 동참
일본군 총에 숨진 권흥규 의사 상여따라 1000여명 만세행렬
장례 현장선 헌병 발포에 상여꾼 등 6명 순국하고 다수 체포
마을 주민들이 지난 20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 정산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청양군청 제공

청양 = 글·사진 정충신 선임기자

“정산3·1만세운동은 농경사회인 시골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천민계급인 머슴, 백정까지 연령·신분·직업을 초월해 벌였던 국권회복 운동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로 뭉쳐 목숨 걸고 일제에 대항한 사례는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11일 오후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정산시장 입구서 만난 윤홍수(92·연세당한약방 대표) 전 정산3·1만세운동현창회장(현창회장)과 복상교(84) 현 현창회장은 “을사늑약에 저항한 최익현 의병장을 배출한 청양군 정산시장 만세 시위자 60여 명이 광복 80주년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된 것은 충절의 고향 청양군과 정산면의 크나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가보훈부는 이번 광복절을 맞아 1919년 4월 5일부터 사흘간 정산시장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운동 당시 일제에 체포돼 태형(笞刑)을 받고 여독으로 순국한 정연봉(태 90도), 이봉식(태 90도), 최상등(태 70도) 선생 3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했다. 그 밖에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태형을 받은 최인섭 선생 등 59명은 대통령 표창이 의결됐다.

윤홍수 전 회장과 보훈부는 정산면사무소에서 발견한 ‘범죄인명부’ 등을 근거로 광복 후 처음으로 한 지역·단일 사건에서 역대 최대 규모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성과를 냈다.

정산3·1만세운동은 충남은 물론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양상의 대규모 시위였다. 마을 사람 700여 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자 일본 헌병은 총을 쏘며 대응했다. 전근대적 신체형인 태형까지 가하면서 현장에서 10여 명이 순국했다. 90~70도 태형을 받은 분은 보훈부 추산으로 150여 명, 현창회 측 추산으론 188명(정산면 147명, 목면 40명, 적곡면 1명)에 이른다. 현창회 관계자는 “태형을 받은 최연소자는 당시 나이 15세(박희보), 최고령자는 66세(송주헌)로, 청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시위에 참여했고, 20∼30대가 3분의 2로 시위를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 어느 지역보다 가열하게 전개된 정산3·1만세운동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시골서 숨어 산 한말 관리 출신 부친의 영향을 받은 20세 청년 홍범섭(대통령 표창)이 마을 동지들을 규합, 거사를 주도했다. 100여 명의 장꾼이 1919년 4월 5일 정산시장 장날 오후 3시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노도처럼 누볐다. 일본 헌병들은 즉각 나서 30명을 강제 연행했다.

충남 청양군 정산3·1만세운동이 전개된 정산시장 앞 연세당한약방에서 윤홍수(앞줄 가운데) 전 정산3·1만세운동현창회장을 중심으로 현창회, 유공자유족회 관계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두영 전 청양군독립유공자유족회장, 윤주섭 유족회장, 윤일수 청양군광복회장, 김신태 현창회 사무차장, 이강용 유족회 부회장, 복상교 현창회장, 박기진 유족회원, 송인문 현창회 사무국장.

만세 시위는 청양군 목면 안심리에 거주하던 정산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 의사가 흉탄에 맞아 순국하면서부터 확산일로였다. 60세의 권 의사는 4월 5일 아침 쌀 1말을 가족에게 구해주고 15리 길을 달려 정산시장에 이르렀다. 당시 홍범섭 등 주모자 30여 명이 일본 헌병에 연행되자 격노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달려갔다. 권 의사는 헌병주재소에 이르자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스려야 할 것이니 너희들은 즉시 물러가라”고 외쳤고 일본 헌병들은 2차례나 공포를 쏘며 위협했다. 이에 권 의사는 앞가슴을 풀어 헤치며 “쏠 테면 쏘아 보라”며 계속 시위 체포자 석방을 요구했고 일본군이 총을 난사해 왼쪽 팔에 맞았다. 그는 더욱 분노해 가슴에다 쏘라고 대들자 흉탄은 권 의사의 가슴을 꿰뚫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격분한 군중은 권 의사의 장례 때 더욱 치열한 시위 행동을 벌였다. 다음 날인 6일 아침 시장 사람들이 시체를 인수해 안심리 고인 댁으로 운구하는데, 각 마을에서 상여를 대고 곳곳에서 노상 제전(祭典)을 올리면서 통곡했다. 지곡리 경유 15리 길을 1000여 명이 뒤따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했다. 이때 충남 공주에서 달려오던 일본군 헌병들이 노중에서 운구 행렬에 발포해 고인의 조카딸과 상여꾼 최윤안·류행길·장응렬·윤광원·김국삼 등 6인이 순사했다. 고인의 어린 딸은 적의 칼날을 손으로 막다 네 손가락이 잘리고, 볼에도 적탄이 관통했으나 겨우 죽음은 면했다. 다음 날 7일 권 의사는 안심리 고현(孤峴) 임자원(壬子原)에 묻혔다. 그 이틀 후부터 일본군의 검거가 시작돼 많은 사람이 붙들렸다. 그중 권영진은 태극기를 만들고, 또 장례 때 명정에 ‘배일사 권흥규지구(排日士權興圭之柩)’라는 글을 썼다고 해 죽임을 당했다. 이날 옷에 황토가 묻은 사람은 시위한 증거로 체포된다는 소문이 돌아 옷을 갈아입었는데 일본 헌병은 옷을 갈아입은 사람은 또 수상하다며 검거했다. 보훈부는 “당시 청양군 정산시장 만세 시위는 매우 치열하게 진행된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이라며 “조선총독부가 신체 자유를 제한하는 형벌인 징역형 대신 폭력적 형벌인 태형을 식민지 한국인에게 광범하게 부과한 사실이 확인된 대표적인 만세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정산면 지역의 포상은 보훈부의 ‘범죄인명부’ 발굴·수집을 통해 진행됐다. 1995년 최초로 범죄인명부 발굴을 시작했고, 정산면의 경우 2001년 충남서부보훈지청 추가 발굴과 올해 보훈부의 전수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윤일수(71) 청양군광복회장과 윤주섭(86) 청양군독립유공자유족회장은 “청양군은 경북 안동에 이어 3·1만세운동 시위 참여자나 희생·피해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곳”이라며 “광복 80주년 대규모 서훈을 계기로 각기 분산된 행사를 통합하고 정산면사무소에 있는 정산3·1만세운동기념탑과 기미의사 권흥규선생순열비를 만세운동 현장인 정산시장으로 옮기고, 별도 추모시설을 갖추는 등 현양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충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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