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2025. 8. 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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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문득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던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산문 속의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초추의 양광을 기다리며 잠시 슈나크에게 빙의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빠져들어 본다.

정원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의 양광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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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사우나 같은 날씨에 갇혀 있다 보니, 맑고 투명한 가을 햇살이 그립다. 문득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던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산문 속의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초추의 양광을 기다리며 잠시 슈나크에게 빙의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빠져들어 본다.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의 양광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차가운 가을비를 피해 떨고 있는 '길냥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주인의 차를 절박하게 따라가는 강아지, 눈 덮인 산속에서 먹이를 찾다 아이들에게 쫓기는 산토끼의 어지러운 발걸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두운 음식점 술 손님들 한편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 가끔씩 술에 취해 힘들면 안방으로 들어와 같이 자겠다고 버티는 아들. 아들은 무슨 걱정이 있기에 다시 아이로 돌아가려 하는지. 아들이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올 때마다 많은 걱정을 하며 마음을 졸였는데 술 깨면 혼 좀 내야겠다고 하니 '너나 잘하세요' 하는 아내. '나 살인도 했어요'라고 고백하니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유가 있었겠지요'라고 품어주던 아내를 잃은 드라마 '무빙'의 구룡포. 아내에게 혼나 보니 구룡포의 아내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딸에게 자꾸 전구를 사 오라고 시키는 웹툰 '조명가게'의 현주 어머니. 밥 딜런은 작사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강풀 작가는 웹툰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 돌아오지 않는 엄마와 엄마를 걱정하며 찬밥처럼 어두운 방에 담겨 있는 아이. 늦게 귀가해 바라보는 딸의 잠든 얼굴. 모든 아빠에게 딸은 인생의 전부였고, 전부이고, 전부일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의 어느 정치인조차도 사돈댁 상가에 문상을 가서 상복을 입은 딸을 보고 남몰래 눈물을 쏟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한달음에 달려온 아이를 맞는 텅 비어 있는 집. 냇가에서 놀다 두고 온 상장을 접어 만든 종이배. 기형도 시인과 나는 참 많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는 기차 차창에 비친 초라한 내 얼굴과 이를 바라보는 그믐달. 군대 간 친구 면회를 가다 본 초겨울 양수리의 물안개. 초가을 개와 늑대의 시간에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비 오는 날 홀로 듣는 산울림의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저무도록 긴 비가 오는 날 처음부터 긴 이별이었단다. 처음부터 긴 이별이란 도대체 어떤 이별인가. 가을비에 뒹구는 젖은 낙엽. 찬바람에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자꾸 허공으로 올라가는 눈. 무엇보다 늦가을 술집에서 적어야 하는 글을 쨍한 여름 사무실에서 적고 있는 필자는 나를 슬프게 한다.

[김상곤 법무법인 광장 경영총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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