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기획 광주·전남 독립운동현장 50] (31)소작인회, 청년회 등 토착조직에 전국 진보단체 결합... 승리 이끌어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下]
근대 학교 통해 부녀자, 면민 등 의식 고양시켜
진보적 사회단체 결합 "전국적 지원 이끌어내"
악덕지주 문재철 임정에 독립자금, 학교 등 세워

소작은 땅 없는 농민들의 목숨 줄이자 밥벌이였다. 소작을 떼이면 더 이상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작인은 늘 지주 앞에서 약자였다. 암태도 소작인들은 이 숙명적인 갑·을의 사슬을 끊어 버렸다. 지주가 부과하던 소작료를 스스로 책정했다. 1924년 8월30일 암태도 소작인회와 지주 문재철이 합의한 사항은 크게 7가지였다.
-소작료는 4할로 하고, 1할은 농사장려금으로 할것
-농사장려금은 조작회에서 관리할 것
-소작회에 지주도 참여할 것
-미납한 소작료는 3개년을 기한하고 분납할 것.
-도괴 철거한 문태현의 비석을 복구할 것
-목하 계속 조사 중인 형사 피고사건은 양방에서 취하할 것
-지주는 소작인 측에 기본금 2천 원을 기증할 것
7개항 합의 외에 세부내용도 합의했다. 소작권 존중과 소작 계약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못 박았다. 또 소작료 체납, 지주 승낙없는 소작지 교환과 전대, 소작권 매매, 경작지 황폐화 등의 사유가 아니면 소작권을 해지할 수 없도록 했다. 소작료를 낮추고, 농사지을 권리도 지킨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1920년대 식민지 농민운동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 암태도 소작쟁의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첫째, 청년회, 부녀회, 소작인회 등 토착조직이 강력했다.
1920년대 암태청년회가 결성됐다. 청년회는 1920년 '여자강습원'을 설치했고, 이후 '암태 사립 3·1학사'로 발전했다. 1924년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의 지원을 받아 교육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3년 암태청년회는 박복영을 회장으로 선출한다. 청년회원들은 1923년 12월 4일 조직된 암태소작인회의 기반이 됐다.

암태부인회는 1922년 8월 결성됐다. 부인회는 1924년 6월 초 진행된 목포 원정투쟁의 튼튼한 동력이었다. 특히 7월 6박7일 동안 처절하게 진행된 제2차 목포 원정 아사동맹(단식농성)을 주도했다. 부인회의 핵심인물은 바로 고백화였다. 암태도부인회 대표로, 소작쟁이에 참여했다가 구속된 박병완의 어머니이다. 아들 박병완의 제적등본을 보면, 고백화의 본관은 장흥이며, 부친은 고순일이다.
최성환 목포대 교수는 "암태도에서 고씨는 도창리와 수곡리에 많이 거주했는데,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에는 단고리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고백화 대표는 1857년 1월 2일 생으로 1924년 투쟁 당시 만 68세였다. 소작쟁의 참가자 중 가장 고령이었다.
최 교수는 "아들이 구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 사정과는 별도로 고백화는 이미 암태도 지역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이었고,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고 강조했다. (논문 '암태도 소작쟁의의 참여인물과 쟁의의 성격')
둘째, 근대교육기관을 통한 면민의식의 고양이었다. 암태도에는 1922년 10월1일 공립보통학교가 문을 열었다. 그전에도 사립학교가 교육기능을 담당했다고 한다. 교육기관은 암태도 소작인과 면민들의 식민지 본건적 농업제도의 비합리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암태 면민들의 여론광장 역할도 담당했다. 소작인회 창립총회가 열린 장소가 보통학교 교실이었다.

셋째, 서울청년회와 조선노농총동맹 등 전국 단위의 진보적 사회단체와 결합이었다. 이들 단체들은 암태도 면민들의 의식을 드높이면서 동시에 암태도 쟁의의 전국화에 크게 기여했다.
서울청년회는 1921년 발족한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단체로 초기에는 민족주의 계열도 참여했으나 점차 사회주의 색채가 짙어갔다. 암태도와 서울청년회의 연결고리는 암태 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했던 서태석이었다.
서태석은 서울청년회를 통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내 사상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암태도 면민들의 목포 원정투쟁이 한창이던 1924년 7월 14일 재경 유지 30여명이 아사동맹동정단을 조직하고 지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때 결의문 발표 장소가 서울 청년회 사무실이었고 결의문 서명자와 동정금 모금책이 서울청년회 회원들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도 적극적으로 암태도 소작쟁의에 참여했다. 노농총동맹은 1924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노동자와 농민의 전국적인 연합 조직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 박병두는 1924년 5월13일 열린 암태도 소작인회 임시총회에 참석, "토지의 권리는 소작인에게 있다"고 연설했다. 또 1924년 8월 30일 지주 문재철과 소작료 등을 합의할 때 암태도 소작인회 대표 박복영과 함께 입회한 인물이 바로 조선노농총동맹 상임집행위원인 서정희였다.

암태도 소작인회는 1925년 1월 4일 회원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 각 동리마다 농노단을 조직키로 하는등 강노높은 투쟁을 결의했다. 소작인회는 1926년 1월 18일 암태농민조합으로 변경됐다. 1927년 3월에는 경제적 투쟁노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조선민족단일당을 결성키로 결의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30-40년대 문 지주의 변신. 문 지주는 박복영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조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소작쟁의의 효시다. 섬 사람들이 얼마나 단결이 잘 되었던지 일본 재벌이 들어와 토지를 사려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외지 사람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1928.8.15일자 동아일보)
암태도 소작쟁의 4년이 흐른 뒤 다시 섬을 찾은 기자는 그렇게 암태도를 기술했다. 오늘도 암태도에 그 혼, 그 함성이 서려있으니…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전남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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