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장서운동 주도 면우 곽종석 선생 등 1910년 전후 굵직한 항일 의거의 중심지 ‘경상남도사’ 포기하지 않았던 희생 증언 다양한 계층의 주체적 참여 있었던 지역 기록은 그날의 사람 이야기 전하는 도구
2019년, 미국의 기록관리를 배우기 위해 현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도서관(기록관) 등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미국의 기록관리 전통과 발전 과정을 직접 보고 배웠다. 여러 기관과 지역을 방문하면서 곳곳에서 눈에 띄는 문장과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Freedom Is Not Free”였다. “자유는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자유와 평등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희생을 기릴 때 자주 사용되는 문구다.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지사와 시민들이 광복에 환호하고 있다./독립기념관 소장/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지사와 시민들이 광복에 환호하고 있다./독립기념관 소장/
또한 ‘Freedom(자유)’, ‘Justice(정의)’ 같은 단어들이 기록물관리기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의미를 기록과 전시를 통해 풀어내려는 노력이 눈에 띄었다. 현장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 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직접 설명해 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짧은 기간 미국에서 느낀 감정은 ‘자유, 정의, 평화’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었고, 이는 과거의 가치를 넘어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더욱 깊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나의 나라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진해 출신 괴암 김주석 선생이 광복 당시 모습을 회고하며 남긴 기록./괴암 김주석 기념사업회 소장/
진해 출신 괴암 김주석 선생이 광복 당시 모습을 회고하며 남긴 기록./괴암 김주석 기념사업회 소장/
진해 출신 괴암 김주석 선생이 광복 당시 모습을 회고하며 남긴 기록./괴암 김주석 기념사업회 소장/
진해 출신 괴암 김주석 선생이 광복 당시 모습을 회고하며 남긴 기록./괴암 김주석 기념사업회 소장/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가진 나라에 살고 있다. 물론 모든 국민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는 그 상식적인 가치를 의심하게 하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헌법은 다음과 같은 가치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이 상식이자 보편의 원칙으로 보장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자유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말 그대로 “Freedom is not free”일 것이다. 올해로 단기 4358년,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과연 ‘자유’를 온전히 누린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우리나라는 중국, 몽골, 일본 등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그 시련 속에서도 민족의 저항, 자주성, 문화적 융성은 반복되고 발전되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이어져 왔다. 물론 그 자유는 나라를 사랑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쌓아 올려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범죄인명부(1913년 ~ 1941년).
범죄인명부(1913년 ~ 1941년).
병적부(징집자연명부) 1927년 ~ 1944년.
병적부(징집자연명부) 1927년 ~ 1944년.
그래서 ‘희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생각하면, 이 글은 너무도 단편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2025년의 대한민국.
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어떤 말도, 어떤 글도 미약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물음에 선뜻 ‘예’라고 답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그 한계이자 출발점이다. 누리는 자유를 앞에 두고 스스로 사슬을 두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가 쓴 매우 미력(微力)한 글이다.
1910년 전후 경남은 굵직한 독립운동의 무대였다.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한 면우 곽종석 선생, 임시정부 자금을 지원하며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백산 안희제 선생,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 선생과 윤세주 선생,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항일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 교육·언론·한글운동을 이끈 이우식 선생,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선생 등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이 글 전체를 할애해도 다 쓰지 못할 이름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 토지의 경영과 관련해 족종형(族從兄)에게 보낸 편지(1943년 이전).
백산 안희제 선생이 토지의 경영과 관련해 족종형(族從兄)에게 보낸 편지(1943년 이전).
‘경상남도사’에 따르면 경남의 독립운동은 격렬하고 반복적이었다. 농민, 어민, 상인, 기생, 걸인, 학생, 종교인 등 다양한 계층이 주체적으로 참여했고, 일본과의 지리적·경제적 근접성으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저항의식이 더욱 고취돼 도시에서 농촌으로, 평화시위부터 무장투쟁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반복적이며, 다양한’ 독립운동은 운동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도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일제의 엄격한 감시와 탄압, 구금, 재산 압류, 연좌제적 불이익 등으로 인해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은 생계를 잃거나 사회적 불이익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까지 나돌았으며, 독립운동에 나선 한 사람이 아니라 그 부모, 배우자, 자녀까지도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고립을 견뎌야만 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헌신은 한 집안 전체에 걸친 희생이었다.
통영의 3.1운동 격문(동포에 격하노라)을 뿌린 진평헌선생의 편지와 봉투.
통영의 3.1운동 격문(동포에 격하노라)을 뿌린 진평헌선생의 편지와 봉투.
통영의 3.1운동 격문(동포에 격하노라)을 뿌린 진평헌선생의 편지와 봉투.
통영의 3.1운동 격문(동포에 격하노라)을 뿌린 진평헌선생의 편지와 봉투.
지금 경남기록원에는 독립유공자임을 입증하는 ‘범죄인 명부’, 뜻하지 않게 전쟁에 징집된 분들의 ‘병적부’가 보존돼 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변상태 선생이 생존 독립운동가들과 주고받은 편지,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등도 수집·보존돼 있다.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당연하거나 값없는 것이 아님을,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증명해 준다.
파리장서 사본(심산 김창숙기념관)
파리장서 사본(심산 김창숙기념관)
파리장서 사본(심산 김창숙기념관)
파리장서 사본(심산 김창숙기념관)
면우 곽종석, 심산 김창숙 등 전국 유림 137인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 내용 중 일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는 반드시 그 사물에 각각의 능력을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작게는 물고기와 조개, 곤충들도 모두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사람과 나라가 각기 스스로 다스리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 우리 국민이 우리 국민인 것은 국토와 풍토가 정해져 있을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지난날 굴복은 일본의 압박에 의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그 속마음은 천만 년이 지나도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최초 작성한 지역독립운동사인 경남독립운동소사 표지.(1966년).
대한민국 최초 작성한 지역독립운동사인 경남독립운동소사 표지.(1966년).
경남 고성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허재기 선생의 이야기(1966년).
경남 고성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허재기 선생의 이야기(1966년).
기록은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편에 서는 일이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날의 사람과 이야기를 전하며, 사실을 전하는 도구이다.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 그 사물에 각각의 능력을 부여한다”는 자유의 천명.
그 기록을 마주하며 100년 전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친 파리강화회의장에 서 있다.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