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천만의 목청을 하늘 길로 고하는 이
천년을 나부끼고도 접지 못한 상소上訴가 있어
뿔뿔이 초야에 묻힌 강골들을 깨우며
오늘도 천만千萬의 목청을
하늘 길로 고하는 이
막바지 밀실섭정의 소리 없는 타박을 견디며
피 묻은 돌멩이가 먼 신전의 종을 칠 때
하나둘 황실을 둘러
스스로 깃발 든 자 성한 육신이 있었더냐
바람 부는 날을 골라 그대 뜻으로 펄럭이던
천추에 대껴온 절개가
종탑너머 빛난다
하얗게 힘 겨루던 천파만파가 그 아래 엎디고
꼿꼿이 뼈만 남은 흑백초상의 짧은 기척
초목도 기립자세로
푸른 뜻을 모은다.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일에 씀. 고정국 詩
#시작노트
20년 전 『서울은 가짜다』라는 시조집을 상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울 한 시인으로부터 "그럼 제주는 진짜냐?"라는 힐난 섞인 추궁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집을 중앙문예진흥원에서 '2003년 올해우수도서'로 선정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올해, '진짜'라는 말이 정치판에 등장했습니다. "진짜 대한민국"과 '가짜 민주주의'를 돌이켜보면서, 가짜의 세월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깃발 든 자 성한 육신이 있었더냐" 오늘 낭송하는 이 「깃발」은 제 스스로 가장 소중하게 아껴왔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2025년 광복절에 이 작품을 꺼냈습니다. 올해 광복절이야말로 진짜 광복절 같다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흑백초상"이야말로, 일제에 맞서 항거했던 민족혼의 대명사이며, 해방 후 '반민특위'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친일세력들의 지배로 신음하는 민중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하여, "막바지 밀실섭정의 소리 없는 타박"을 견디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간 "꽃송이"의 원혼들이 새삼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비로소 진짜 대한민국, 진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면서, 해방 80년의 광복절을 맞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25년 8월, 하릴없이 나이만 먹는 나의 처지임에도 "기립자제로 푸른 뜻을 모으는 초목들과 함께 한반도 산천초목의 대열에 끼고 싶어 「깃발」의 후반부를 다시 낭송하렵니다.
스스로 깃발 든 자 성한 육신이 있었더냐
바람 부는 날을 골라 그대 뜻으로 펄럭이던
천추에 대껴온 절개가
종탑너머 빛난다
하얗게 힘 겨루던 천파만파가 그 아래 엎디고
꼿꼿이 뼈만 남은 흑백초상의 짧은 기척
초목도 기립자세로
푸른 뜻을 모은다.
신동엽 시인은 1964년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나도 제발, 제발 "가짜의 시대는 가라!"라고 되뇌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진짜 대한민국 만세!!! 진짜 민주주의 만세!!!"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