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서 꽃피운 지역산업… 韓 경제심장 ‘우뚝’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完]

이연우 기자 2025. 8. 1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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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폐허 속 일궈낸 기적의 경제... 경인지역 인구·산업 등 전국 1위로
광복 전후 열정의 손·발길 기억해야
광복 80주년 특별 기획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完. 한국 경제 주역 ‘경기·인천’
주인 없는 자리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땀방울을 흘렸다. 미군이 버린 군용 부품을 재활용해 자동차를 만들고, UN이 지원한 식료품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등 헌신의 형태는 다양했다.

수많은 침탈의 역사를 지나고 아무것도 없던 대한민국 황무지에서 오로지 ‘먹고 살자’는 마음 하나로 이뤄진 ‘개척’이었다. 삶에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이뤄진 도전의 시간들은 시대가 되고, 세월이 되고, 여정이 됐다. 단순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는 지난한 인내들을 통해 비로소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이 일궈졌다.

이러한 경제 지도는 특히 경기·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인구가 많고 교통이 편하며 수도와 인접한 특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덕분이었다. 지역 경제의 개척자들은 장터에서 시장으로, 클러스터로, 세계로 뻗어나가며 각각의 공급망·유통망·수요망을 갖춰갔다. 제조업, 건설업, 식품업 등 분야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의 지역 산업들이 변동과 풍랑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 결과 경기·인천은 인구 수나 산업 여건 등에서 우리나라 1위를 거머쥐는 우수한 지역이 됐다. 지난 2023년 기준 경기·인천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총 710조4천190억 원으로, 같은 기간 국내 실질 국내총생산(GDP·2천247조원2천억 원)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명실상부 한국의 산업 중심지가 되기까지, 광복 전후로 개개인의 열정적인 손길과 발길이 묻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역 경제의 개척자들’이 남긴 기록은 과거의 회고이자, 새로운 출발의 나침반이다. 열악한 최빈국 거리에서 꽃을 피워냈던 사람들을 증언하는 동시에, 미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갈 신(新)산업들에게도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시리즈 기사’는 이번 완결로 끝나지만 크고 작은 기업·자영업을 갈고 닦아왔던 우리네 지역 정신은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누군가 그랬다. “경기·인천지역 기업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단순히 ‘생존 과제’로 여기지 않고, 체질을 바꾸며 확장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한 전략적 결단이 우리 경제의 ‘V자 반등’을 가져왔고, 현재 우리나라가 글로벌 강자로 자리 잡게 된 기반이다.”

특별좌담회 : 韓 경제 주역 경기·인천
“산업화 초석 지역 기업… 글로벌 기술강국 원동력”
(왼쪽부터)①이두희 KIET 산업연구원 지역경제 연구단장. ②신기동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③김천구 대한상공회의소 SGI 연구위원. 본인제공·윤원규기자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퍼진 우레 같은 ‘광복의 함성’은 해방의 기쁨을 넘어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는 전 국민의 결의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식민 지배의 그늘 속에서 산업 기반은 전무했고 인적 자본도, 기술력도, 자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황무지에서 우리는 국가 재건의 첫 삽을 떠야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로 그 빈손에서 시작됐다. 국민은 다시 땅을 일구고, 기술을 배우고, 산업을 세웠다.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제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성장 여정은 ‘재건’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온 국민이 몸소 실천한 과정이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2025년 8월,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술 강국으로 우뚝 섰다.

이러한 비약적인 성장의 시작점이자 뿌리가 바로 ‘경기·인천지역’이다. 한반도의 관문이자 수도권 핵심 산업벨트인 이곳은 해방 이후 산업의 불모지를 개척하는 최전선이었다. 광활한 평야와 항만, 그리고 철도·도로망이 어우러진 지리적 이점 덕분에 기업들은 이 지역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실험했다. 섬유·화학·금속공업에서 시작해 전자·자동차·건설 등으로 확장된 산업군은 경인지역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심장으로 만들었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전초기지이자, 향후 100년을 설계할 핵심 플랫폼인 경기인천지역. 대한민국의 산업을 개척하고 설계한 이들의 발자취와 그 안에서 경인지역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특별기획팀은 각계 전문가들과 특별 좌담회를 갖고 ‘기억해야 할 우리의 지난 80년 산업 역사’를 정리해 봤다.

[좌담회 참석자] 김천구 대한상공회의소 SGI 연구위원, 신기동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두희 KIET 산업연구원 지역경제 연구단장

Q. 광복 직후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 그 속에서 ‘기업’이 갖는 의미는.

김. 1945년 광복 직후,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했다. 국가 체계, 시장 구조, 그리고 산업 인프라도 부재한 상황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기업은 단순히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생존을 뒷받침하고 국가 재건을 위한 실질적 기반 역할을 했다.

당시 기업은 국가 주도 성장의 체계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일자리를 만들고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며 직원들에게 기술과 숙련도를 전수하는 식으로 우리나라 산업화의 초석이 됐다. 교육과 복지 역할까지 수행했던 기업의 활동은 오늘날 국가 시스템 일부와 유사한 공공기관의 면모를 띠고 있다.

즉 광복 이후의 우리 기업은 단순한 생산의 주체를 넘어 국가 기능의 일부를 수행한 산업사회 개척자이자, 지역과 국가를 복구해 낸 기관이라 할 수 있겠다.

신. 광복 이후 정부 수립까지 3년의 정부 공백기(무정부 상태)가 있었고 그 뒤 한국전쟁 3년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 주도의 성장을 언급할 만한 국가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정부의 역할 부재 상황에서도 민생은 지속돼야만 했기에 광복 직후 일제강점기의 잔재나마 활용해 기간 산업을 되살리고 자산을 끌어모아 기업을 일으킨 민간 기업인들이 경제 성장의 주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 하면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도 경제개발계획의 성과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광복 이후 1940~50년대 기간에 성장하고 뿌리내린 각 분야 산업의 개척자들이 다져놓은 발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업 등의 힘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도약이 이뤄졌기에 그 경제사적 의의를 부여할 가치가 있다.

Q. 현재의 산업 구조가 만들어지기까지, 과거 시대적 상황들은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신. 광복 직후 일본 자본의 철수로 인해 파손되고 취약해진 경제시스템을 복원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자본과 기업, 핵심 기술인력이 철수해 산업 생태계가 붕괴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움이 없이 한국의 자본가와 기술인력이 투입돼 주력산업을 재생시켜 나갔으며 이들 개척자 기업들을 중심으로 파생된 전후방 연계산업들이 발달하면서 지역산업 생태계가 복원되고 고도화돼 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탈식민지 이후 한국처럼 급속하게 경제적 자립을 성취한 사례를 드물며, 더욱이 전쟁으로 식민지 잔재조차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경제대국의 지위에 오른 것은 식민지의 유산이 아닌 ‘한국인의 특별한 능력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Q. 경기·인천 안에서 거점을 갖춘 산업들이 있는데 어떤 특성이 주효하게 작용했나.

이. 경기·인천 산업 거점은 교통과 물류의 허브인 점, 기존 제조업의 집적과 첨단산업의 융합이 이뤄진 점, 수도권 대시장 및 인력풀 접근성, 정부·지자체의 전략적 산업단지·경제자유구역 육성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됐다.

여기에 더해 서울이라는 대규모 수요시장을 잘 활용한 측면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기술과 품질, 조직의 역량 축적에 따라 대기업-부품소재 중소기업의 공급망이 완성되고 여기에 강력한 물류망이 구축돼 전국 산업단지와 지방 거점 생산 네트워크가 형성된, 수출과 내수 모두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가 성공 요소로 판단된다.

신. 경제지리학 이론에 따르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제조업이 일차적으로 집중하게 되며 이는 국제분업에 기반한 세계 경제시스템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설명된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천항 배후에 경인공업지대가 발달한 것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소득수준이 극히 낮아 내수 소비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식민지 경제에서 수출산업이 우선적으로 발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전력 사정이 좋은 북한 지역에 광공업이 더 발달하기도 했지만, 남한 지역에서는 노동력이 풍부한 서울과 수출항인 인천을 배경으로 한 경인축 일대가 수출산업 발달에 양호한 입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Q. 당시 기업인을 단순한 ‘경영자’가 아닌 산업의 ‘개척자’로 볼 수 있는가.

이. 경기도와 인천광역시에서 활동한 기업인들은 단순히 기존 산업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아직 국내에 존재하지 않던 산업 기반과 시장을 만들어낸 1세대 개척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활동은 기업 이윤을 넘어, 국가 산업 구조와 지역 발전의 틀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 가치가 높다.

경기도·인천 기업의 생존과 확장은 시장·기술·정책·인적 네트워크가 선순환하며 특히 대기업·중소기업 집적 구조와 글로벌 품질·기술 경쟁력이 지속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새로운 산업을 열고 기술·시장·사람을 연결한 ‘산업 설계자이자 개척자’로 볼 수 있다.

김. 당시 기업인을 단순히 경영자로 정의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기존 산업이 전무하던 시기에 신산업을 만들어낸 창업가이자 산업의 설계자다. 맨손으로 회사를 세우고, 제품을 기획·생산했으며, 고용을 창출하고, 시장을 개척해 낸 주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부족한 자본력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 제작하거나 개조하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역 주민을 고용하고 직원의 가족을 돌보며 경영이 어려울 땐 고통을 분담했다. 이러한 연대적 경영방식은 단순한 생존 전략이자 동시에 브랜드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자본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기업을 통해 경제를 만들었고, 지역을 통해 공동체의 기반을 설계한 이 시대 산업화의 실질적 주역이다.

Q. 지역 산업의 성장 과정에서 기업과 사회는 공생 관계였나.

김. 기업은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을 위해 직원들의 자녀 장학금 지급, 마을 길 보수, 지역학교 후원 등 다양한 사회적 기여도 수행했다. 특화된 산업이 지역과 성장하고, 주민은 기업과 공동체적 관계를 맺으며 지역의 대학들에서 혁신 인재가 적절히 공급될 때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반이 마련된다.

지역민들도 이러한 기업에 높은 충성도를 보이며 일터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며 경기도를 생산과 기술의 중심, 인천은 물류와 유통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했다. 산업과 지역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뿌리내릴 수 있는 시스템 설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경인지역은 그 가능성을 역사 속에서 이미 보여준 선례다.

Q. 이들 지역 기업의 미래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 향후 우리 경제는 미국과 중국의 통상마찰, 경제안보, AI디지털 전환, 그린전환,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재편 등 다양한 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광복’의 경험은 우리 몸에 체득돼 향후 다양한 경제적 도전에 실패를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DNA가 될 것이다. 이러한 DNA를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경인지역 기업들의 미래는 단순한 생산 경쟁에서 벗어나 첨단기술·친환경·글로벌 네트워크 혁신을 얼마나 빠르고 과감하게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성공 시 한국 경제의 ‘차세대 경제적 광복’을 이끌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기대한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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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우 기자 27yw@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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