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산 건 다 남의 덕…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더라”

600일, 31개 도시, 139회 공연. 객석은 모두 꽉 찼다. 지난 9일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의 마지막 공연을 마친 배우 신구(89)는 경북 구미시 구미문화예술회관의 깨끗이 치운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아 홀가분하게 웃었다. “아쉬운 거야 말로 어떻게 다 하겠어. 그래도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남 덕분으로 여태껏 살아온 거야.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어. 고마운 일뿐이지.”
이날 구미는 유례없는 전회 전석 매진 기록을 이어온 연극 ‘고도’의 종착역이었다. ‘고고’ 신구는 ‘디디’ 박근형(85)과 함께 모든 공연을 소화했다. 관객은 어림잡아도 10만명이 넘는다.

공연 40여 분 전 사전 점검을 마친 배우와 스태프가 무대에 모여 외친 ‘파이팅 콜’은 이날도 “언제나!”, “처음처럼!”이었다. 신구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 구호는 연습 때부터 그대로다. 무대에 오르기 전 분장실에서 잠깐 숨을 돌리던 신구가 말했다. “요새 부쩍 걷는 게 힘들어졌어. 매일 아침 일어나면 먼저 한 번 걸어 보지. 오늘은 제대로 걸을 수 있으려나, 하고.” 신구는 이미 국립극장 ‘고도를 기다리며 더 파이널’ 공연 때 제작사 파크컴퍼니 박정미 대표에게 “우정 출연은 늘 환영이지만, 이제 오래 무대 서긴 어려울 것 같다”는 뜻을 전했다. 140분짜리 ‘고도’처럼 긴 시간 무대에 서서 연기하는 그를 보는 것은 어쩌면 이날이 마지막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이날 연극 대사들은 마치 그 자신의 말처럼 들렸다. “그동안 좋았소?” 묻는 ‘포조’(김학철)에게 ‘고고’(신구)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했다. “어째 떠날 맘이 안 생기는데…”라는 포조의 말엔 “그게 인생이죠” 하는 고고의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 장면, 끈이 끊어진 고고의 바지가 흘러내리자 관객은 또 폭소를 터뜨렸다. “나 이제 이 짓 더 못 하겠어.” 고고의 말에 디디가 무심히 답했다. “다들 하는 소리지. 바지나 추켜올려.” 관객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디디가 “그럼, 갈까?” 물을 때 고고는 “그래” 하고 답하지만, 둘은 무대를 떠나지 못했다. 그대로 암전.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신구는 “이 연극, 실은 처음 제안받고는 망설였다”고 했다. “건강 문제가 생기면 전체에 영향을 주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연극 하는 동안 신구는 늘 한결같이 그 마음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광주에서 ‘살짜기 옵서예’를 공연하고 있었다. 지난 7월엔 아내 하정숙(87)씨를 먼저 떠나보내고도 장지에 따라가지 않고 충북 음성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빈소에서 만난 그는 “관객들이 기다리잖아” 했었다. “유치진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거야. ‘관객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그는 2023년 급성 심부전증으로 심장박동기를 달고도 감정 변화가 극심한 무대 연기를 계속해왔다. 2022년 초 연극 ‘라스트 세션’ 두 번째 시즌 땐 공연 뒤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사는 “폐에 물이 80% 찼다. 무대에 오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는 “내가 책임진다”며 계속 무대에 올랐다.

연극 ‘라스트 세션’에 함께 출연했던 이상윤 배우가 말했다. “선생님은 ‘죽을 둥 살 둥 해야 조금이나마 나아진다. 그러니 죽을 둥 살 둥 하라’고 하셨어요. 늘 기억하려고 해요.” ‘고도’에 광인 ‘럭키’ 역할로 함께 출연한 조달환 배우가 거들었다. “늘 말씀하시는 건 근면, 성실, 정직, 그리고 트루스(truth)예요. 가슴에 새기고 살려고요.”
신구는 “남의 것 따라 하고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했다. “이번 아니면 다음이 있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 갖곤 안 돼. 이게 마지막이다, 그런 생각으로 덤벼들어야 돼. 한 번밖에 없는 생이라고 하잖아.” 허허롭게 웃는 노배우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하나였다.

[관련 기사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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