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더 큰 권력이 주어졌을 때

유정훈 변호사 2025. 8. 1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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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해방 이후 100년이 지나서야 흑인의 투표권을 실제로 보장한 1965년 투표권법은 1964년 민권법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입법이다. 지난 8월6일이 투표권법 제정 60주년이었는데, 미국의 정권이 교체됐음을, 역대 어느 정부와도 다른 트럼프 2기라는 점을 실감했다. 작년 7월2일 민권법 60주년은 바이든 정부가 성대하게 기념했지만, 올해 투표권법 60주년은 연방 차원에서 기념하지 않았고 미국 사회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표권법은 실효성을 잃어가고 있다. 연방 하원 의석수가 두 번째로 많은 텍사스주의 게리맨더링이 지금 쟁점이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대도시 지역구를 외곽의 공화당 우세 지역과 분산·통합하는 선거구 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텍사스에 배정된 연방 하원 38석 중 현재 공화당이 25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방안이 채택되면 다음 선거에서 공화당이 의석을 30석까지 늘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식의 선거구 조정이 가능해진 이유는 연방대법원이 지속적으로 투표권법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은 2013년 셸비 카운티 판결에서 인종차별적 선거구 획정을 막기 위한 핵심 조항을 위헌으로 선언했다. 2019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선거구 획정 사건에서는 “정당 편향적 선거구 조정은 법원 관할이 아닌 정치적 사안”이라 판시했고, 2024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사건에서는 “게리맨더링이 어느 인종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만으로 차별적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런 뉴스를 보며 투표권법을 입법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연설을 다시 찾아 읽었다. 투표권법이 발효된 것은 1965년 8월의 일이지만, 그해 3월15일 존슨 대통령이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의회에서 투표권법 제정을 호소한 특별연설은 역사를 가른 결정적 순간으로 꼽힌다. 그 며칠 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이끄는 흑인들이 투표권을 요구하며 행진하자 경찰이 이를 유혈 진압해 미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존슨 대통령은 그 정치적 모멘텀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처음 일한 곳은 텍사스주 커툴라에 있는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다니는 작은 학교였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영어를 제대로 못했고, 저는 스페인어를 거의 몰랐습니다. 학생들은 가난했고 대부분 아침을 거른 채 등교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지만 그들은 차별의 설움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자기들을 싫어하는지 이해는 못했지만, 그들의 눈을 보면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들이 인생에서 겪을 어려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제가 그나마 가진 지식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연설은 이어진다. “1928년 당시에는 1965년에 제가 이 자리까지 오를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의 자녀 세대를, 같은 처지의 다른 국민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오르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저는 그 권력을 사용할 것입니다.”

미국의 투표권법은 선거제도가 다른 한국과 접점은 없다. 지금의 미국을 생각하면 이런 연설은 지나간 추억이라 여길지 모르겠다. 존슨의 개인적 품성, 베트남전 개입에 관해서는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이 주어졌을 때, 자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잊지 않았고, 공동선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부통령으로 끝날 것 같던 정치인이 예상치 못하게 권력의 정상에 오르자 노예해방 후 100년 넘게 안 되던 일을 2년도 되지 않아 해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직후 예상을 깨고 민권법 제정에 나섰다. 1964년 대선에서 압승하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선출된 임기를 개시한 직후인 권력의 정점에서,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차별받는 학생들을 떠올렸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권력을 행사했다.

인종별로 화장실도 따로 쓰는 사회로 남았다면 미국은 지금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인종차별 철폐는, 여러 대가를 계산하고 감수하며, 사회 진보와 소수자 보호를 현실에 구현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지금 한국도 그런 일은 필요하다. 탄핵과 대선을 거치며 많은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다. 더 큰 권력이 주어졌을 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대의를 위해 이를 사용할 정치인과 공직자를 기대한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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