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진 대기만 8개월...업무상 질병 산재 절차 개선되나
“휴직계 냈다가 다시 아픈 몸 이끌고 오전 노동 중”
근로복지공단, 업무상 질병 산재 신청 많아 대기 길어져
산재 추정의 원칙 적용도 100건 중 4~5건으로 적어
노동계, 빠른 산재 승인 또는 ‘선진료 후승인’ 등 건의

"근로복지공단에서 특별진찰 받으라 해서 금방 되겠거니 했는데 최소 8개월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휴직 상태에서 아픈 몸 이끌고 오전 근무만이라도 하게 해달라 했다. 먹고 살아야 하지 않나."
ㄱ(48) 씨는 부산 강서구 한 소규모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25년차 용접 노동자다. 그는 창원시 진해구 STX조선해양(현 케이조선)에서만 20년가량 용접 노동자로 일했다.
지난해 12월 12일, ㄱ 씨는 갑작스레 어깨에 불편함을 느꼈다. 별일 없겠지 싶어 통증 부위에 파스만 붙이고 일했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그는 올해 5월 한 병원에서 MRI(자기 공명 영상) 촬영을 했다. 병원은 회전근개(어깨를 감싸고 있는 힘줄)가 파열됐다고 진단했다. 병원은 ㄱ 씨에게 사고성 산재를 신청하라고 권유했다. ㄱ 씨는 즉시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 후 휴직했다. 근로복지공단은 6월 ㄱ 씨에게 산재 불승인을 통보했다. 어깨 사고와 용접 작업의 연결성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ㄱ 씨는 6월 말 근골격계 질병으로 산재를 다시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 담당자는 ㄱ 씨에게 산재 여부 판단까지 6개월가량 소요될 것이라고 알렸다. ㄱ 씨는 수입 없이 살 수 없었기에 오전에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회사에 복직했다. 7월 말,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질병 특별진찰(특진)을 받아야 한다고 연락했다. ㄱ 씨는 근로복지공단 창원병원에서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특진 시기를 문의했는데 최소 8개월을 대기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는 기초조사-특진-판정위원회 등을 거친다. 특진은 업무와 질병 사이 연관성을 확인하는 중요 절차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신청자의 특진 대상 여부를 판단해 특진의료기관에 의뢰하게 된다. 특진의료기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산업위생기사는 산재 신청자의 △질병력 확인 △직업력 조사 △신체부담 요인 조사 △의학적 검사를 통해 소견서를 작성한다. 진단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특진 대기 인원이 많아 당사자는 진단을 받기까지 오랜 기간 기다려야 한다. 이후 역학조사 등 추가조사나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를 거쳐 재해 여부가 결정된다.
ㄱ 씨는 "내년 4월까지 반토막 난 수입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하다"며 "공단 담당자는 소규모 영세사업장의 경우 '산재 추정의 원칙'도 쉽게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해 특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ㄱ 씨처럼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하는 경우, 산재 처리 기간은 질병과 직업 연관성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보면,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 평균 기간은 2023년 214.5일, 2024년 227.7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는 이 같은 산재 처리 장기화 문제를 개선하고자 2022년 신속심의 제도인 '추정의 원칙'을 고시에 반영했다. '추정의 원칙'은 업종, 직종, 상병, 근무기간 등을 충족하면 산재판정 절차를 간소화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조선소 용접 노동자로 10년 이상 일한 자가 어깨 회전근개가 파열됐다면, 구체적인 조사를 생략하고 산재로 인정받는다.
다만 근로복지공단은 추정의 원칙을 적극 활용하지는 않고 있다. 공단은 2022년 기준 근골격계 질병 산재신청 건 1만 2491건 중 3.74%(468건), 2023년 14448건 중 4.22%(610건)에만 추정의 원칙을 적용했다.
ㄱ 씨는 "노조가 있는 중형조선소에 다니는 지인은 업무상 질병 산재를 3달 만에 받았다고 들었다"며 "영세사업장에 노조도 없는 노동자는 산재처리 우선순위도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사업장 규모나 노조 여부에 따라 처리 기간에 차이를 두지는 않는다"며 "최근 업무상 질병 산재 신청이 급증한 데다, 추정의 원칙은 역학적 근거가 부족할 수 있기에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노동계는 산재 처리 기간 단축 대책을 촉구했다.
문상환 금속노조 경남지부 미조직비정규직사업국장은 "산재는 첫 승인 여부 판단에도 시간이 걸리고, 불승인 재심사 처리기간도 60일로 정해져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중소사업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특히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생계 유지도 어렵기에 간소화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병훈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노동안전국장은 "노동자 고령화와 동시에 오랜 단순 육체 활동으로 업무상 질병이 급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산재 추정의 원칙을 보수적으로 적용할 게 아니라, 확대 적용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또한 선 치료, 후 조사 형태로 이들이 빠르게 질병을 치료하고 일상에 복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조승래 국정기획위 대변인은 이달 5일 "업무상 질병 재해 평균 처리 기간을 2027년까지 120일로 단축하는 방안을 대통령실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관련 절차를 전체적으로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치료비·보상금 선 보장, 후 산재 판정'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지산 기자